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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Oct 07. 2022

어른으로 레벨업 +1

묵은 추억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때때금 별다른 이유 없이 한 해에 두세 번 불면증의 시기가 찾아오곤 하는데, 요새가 그랬다. 처음에는 잠 못 이루는 밤에 이리저리 뒤척이고 하다못해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되다 보니 이제는 잠이 오지 않음에 겸허히(?) 그저 가만히 곰곰이 눈을 감고 이 밤이 지나길 기다린다. 요새 계절이 바뀌어서 잠이 안 오는 것일까나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밤을 지새우길 열흘 정도가 지났다. 어제 드디어 기절하듯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무겁고 힘겹도 열흘이 지나 오래간만에 개운하게 잤더니 아침에 새삼 몸이 개운했다. 직장인의 금요일 아침은 월요일부터 출근해서 누적된 피로에 몸은 무겁기 마련이건만, 오늘은 가벼웠다. 추석까지만 해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여름이 오래가네~' 하던 날씨가 당장 오늘은 꽤 쌀쌀하였다. 가벼운 외투를 여매며 출근하는 길 유독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마저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여느 습관처럼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걷는 출근길에, 따뜻한 목 넘기에 더 상반되어 양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당연한 듯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로 쓸어 내었다. 머리카락 뿌리까지 시원한 바람이 닿자 머리도 마음도 문득였다.


폰을 켜자 눈길 끝이 구글 클라우드 앨범으로 향했다. 올해는 처음 열어보는 것 같다. 나의 사진 앨범은 3가지로 분류되어 있다. 연도별, 여행지별 그리고 주인공별. 얼마간 잊고 지냈던 전 남자친구들의 이름들이 각 상자에 담겨 있었다. 그 이름들은 그리운 마음이 아니라 반가운 마음에 와서 닿았다. 마치 대학교 동창의 이름을 갑자기 들었을 때처럼. 시간 역순으로 한 사람씩 상자를 열었고, 시간순으로 추억을 돌이켜 보았다. 사진을 찬찬히 보는데 입술이 옴짝달싹거렸다.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내가 귀엽기만 하고, 그 사람과 그런 즐거운 시간이 있었지에 대한 회환 때문이랄까. 그리고 한 상자를 닫을 때마다 지체 없이 휴지통에 담고, 다시 휴지통에 가서 휴지통을 비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한 사람 한 사람들과의 추억을 드디어 오늘 버리게 되었다. 전에는 나중에 후회할까 봐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는데, 오늘은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들과의 시작적인 추억들을 버려도 정말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오늘 이 순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해내었다. 어떤 상자는 아직도 그 사람 구글 계정과 연동이 되어 공유되고 있었다. 그 연결상자는 내 상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주춤였지만 끝내 삭제했다.


우리말에 시원섭섭이란 말이 있고, 비슷한 영어단어로 Bittersweet이 있다. 이 기분은 시원 섭섭보다는 Bittersweet에 가깝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에는 정말 소중한 추억이고 영원할 것만 같은 기억들인데, 헤어지는 순간 그것은 '한 때'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 사실에 약간의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계속 가지고 있을수록 현재에 죄책감을 들게 하는 추억들을 정리하고 또 그 정리에 이은 마음이 전혀 슬프지가 않다는 깨달음에, 달콤한 초콜릿을 먹었을 때 살짝 올라오는 스릴적 쾌감이 스쳤다.


클라우드 용량까지 가벼워진 찰나, 그가 출근은 잘했는지 아침 라떼는 한 잔 마셨는지 습관적이고도 애정 어린 연락이 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클라우드 앨범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상자가 없다. 그와 나는 영원한 약속을 했고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건 영원히 죄책감이 될 일이 없기 때문에 폰 앨범에 있지 클라우드 앨범에 숨겨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Who knows?'라며 영원한 건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고 하겠지만, 새삼 '한 때'가 되지 않도록 영원히 충실하고 소중히 해야겠음을 마음먹는 아침이다.



글을 쓰고 보니 겨우 오랜만에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서 전 남자 친구들의 사진을 지우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나 장황하고 갖은 형용사을 붙인 마음을 대다니 그 대단함이 우습다는 생각에 코웃음이 내쳐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전 남자 친구들의 추억을 지우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이 컸었는데, 오늘 그건 굉장히 쉽고 빨랐다는 것에 대한 놀라운 희열에서 장황할 수밖에 없었다. 집착했던 묵은 추억을 버릴 수 는 용기가 생각보다 찰나의 순간에 갑자기 찾아왔는데, 사실 그럴 수 있었던 건 그간 감정과 경험이 성숙하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얽메이지 않을 수 있는 오늘까지 축적이 다다랐음 덕분이다. 마치 나의 기준으로써의 으른이 되었다는 증거가 하나 추가 되어 레벨업을 한 오늘, 스스로의 뿌듯함에 이 글을 안 노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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