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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Jan 22. 2024

이토록 아름다운 실패

타케 마사하루, <백엔의 사랑>

루저(Loser)라는 말이 있다. '실패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 단어에 어울리는 한 여성이 있다. 평범한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먹고 자는 일 외에는 딱히 아무런 계획도, 의욕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는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임을 인정한 채, 무기력한 삶을 연명해 간다. 그러던 중 동생과 큰 다툼 끝에 집을 나서게 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지만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에게 세상과 삶은 너무도 크고 높은, 거대한 벽처럼 솟아있다. 그녀는 벽 안에 갇혀 있다. 삶과 분리된 삶으로, 세상과 분리된 세상으로 고립된 채 삶이 아닌 삶을, 세상이 아닌 세상을 살아간다. 그녀에게 삶과 세상은 저 너머 어딘가에 구경거리처럼 놓여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삶이라는 구경거리를 가까이서 볼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이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지금 우리는 각자도생의 사회에 살고 있다. 정규 궤도에서 한 걸음만 발을 떼어도 곧장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각자 감내하며 이어간다. 서로 손을 잡아줄 여력 같은 것은 없다. 자칫하면 내가 흔들리고 추락할지도 모른다. 나는 눈앞의 줄에 몰두해야 한다. 한 눈을 팔기엔 너무 위험하다. 부여잡고 있는 한 가닥 줄마저도 놓치는 날에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놓쳐버린 줄은 곧장 개인의 무능으로 취급되고 회생의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은 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다가 결국에는 그마저도 무관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끼리조차도 서로를 멸시한다. 나는 실패자이며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 백엔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물건처럼, 동전 한 닢의 가치로 폄하되는 찰나에 소비되는 생필품처럼, 혹은 불우이웃 돕기에 쓰이는 처리 곤란한 거스름돈처럼. 이 영화는 그 줄을 놓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을 살 수 있는 백엔짜리의 삶. 하지만 그들에게도 사랑의 불씨는 남아있다. 어느 날 그녀는 불씨가 꺼져가고 있음을 맞닦드리고 다시 혼신의 숨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밖으로 보이는 정상의 세상 뒷 공간을 배경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는 펼쳐진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골방 혹은 원룸, 밤새 밝게 밝혀진 편의점 뒤의 어두컴컴한 창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무용하기 그지없는 땀에 젖어있는 체육관, 그리고 현란한 네온사인으로 더욱 쓸쓸한 밤거리. 어둡고 특징 없는 공간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방향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지도 못한 채 허공을 응시하며 어긋나게 교차한다. 한 공간에 있을 뿐 그들은 같이 있지 않고, 말을 쏟아낼 뿐 대화하지 않으며, 데이트를 하지만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패했고 서로의 실패를 외면하며 각자의 실패를 감당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실패에도 역사는 있다. 그들은 각자의 실패를 보상받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탈출구를 찾아 나선다. 그중 복싱이라는 '건전한' 탈출을 감행하는 한 남자가 나타나고 주인공 이치코는 그 남자를 보며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세상에서는 혼심의 힘을 다해 싸우는 일이 아주 간단하게 허락되며 그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되 어떤 결말이든 격려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링에서 내려오면 된다. 아주 간단하지만 멋진, 마음껏 나를 드러내도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는, 서로에게 정직하게 나일 수 있는 공간. 내 자리가 있는 주변이 아닌 주인의 공간. 하지만 이곳에서도 승패는 결정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 루저는 또다시 실패를 감당해야 한다. 주인공 이치코는 남자의 실패를 목격하지만 그녀에겐 승패의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곳은 세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동아줄이 된다. 그러니 부여잡을 밖에.



이 영화의 호흡은 길다. 지루할 수도 있으리만큼. 그 긴- 호흡을 통해 영화는 그녀와 그들의 실패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 한심하고 나태한 그녀의 삶과 엉망진창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현실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렇게 긴- 호흡으로 그들의 답답한 삶을 계속 응시하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사회적'이 아닌 '인간적'인 시선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낭떠러지에 몰린, 더 이상 돌아볼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어쩌면 강요되었을 그녀의 선택에 우리는 납득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는 그동안의 긴- 호흡과는 달리 가히 압도적으로 화면을 채우며 그녀의 분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전체를 건 시합을 보여주는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신은 그래서 전형적이지만 전형적이지 않다. 멸시당했던 별 볼일 없는 밑바닥 인생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싸움을 해낸다는 면에서는 전형적인 '상황'이지만, 그 싸움을 영웅적인 면모로 형상화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전형적이지 않다. 마지막 신에서 보이는 그녀의 처절하지만 굴복하지 않는 의지는 단지 영웅이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고난과 싸움의 과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루저로 살아온 삶에 대한 처절한 절규에 가깝다. 그리고 세상의 벽은 여전히 크고 높다. 그녀의 분투는 처절하지만 역시나 거대한 벽 앞에서 초라하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마지막 신에서까지도 그녀는 루저답게 싸운다. 분투하지만 쓰러지고 처절하게 무너지고 마는.



하지만 이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에서 우리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실패자가 분투하면서도 또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광경을 목격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어떤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실패가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하는 이상한 감정. 그리고 가슴 밑바닥에서 벅차오르는 어떤 뭉클한 무엇. 어쩌면 이런 광경, 이런 감정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말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만은 아닌 것이다. 불가항력의 한계를 넘어서 솟아오르는 어떤 의지를 보았을 때 내 마음이 경건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 벅차오르는 감동. 우리는 이런 감정을 '숭고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자가 실패하는 숭고함. 이것이 이 영화의 후반부가 보여주는 위대한 풍경이다. 그녀의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가 굳이 연민하지도 굳이 추켜세우지도 않는, 그저 그녀의 실패를 응시하듯 보여주는 그런 시선에서, 우리는 오히려 작위적이지 않은, 강요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도 않은 이상한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신은, 그간 밑바닥 인생의 마지막 투혼을 보여주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아니 아름답고 숭고하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영웅적인 면모를 성취한다. 비극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실패자로서.


이 영화는 실로 대단한 작품이지만, 그래서 2016년 일본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지만(그해 작품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돌아갔다. 왠지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대신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대단함은 단지 그 서사와 영화적 미학에만 있지 않다. 이치코라는 루저의 삶에 혼연일체로 몰입하여 그 인물의 억압되고 응축된 에너지를 보여준, 영화 속 인물만큼이나 분투하는 연기가 아름답게 빛났던 '안도 사쿠라'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어질 정도로, 인물과 동화되는 그녀의 연기는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본 일본 영화 중에는 가장 빛나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명작이다. 국내에서 리메이크를 진행 중에 있다는데, 기대가 되면서도 우려가 큰 게 사실이다. 과연 이 영화의 아우라를 넘어설 수 있을지...



각본: 아다치 신

감독: 타케 마사하루

출연: 안도 사쿠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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