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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Jan 29. 2024

인간 안의 신성(神性), 그것은 사랑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이 영화를 '재난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까. 영상 플랫폼의 분류 상으로는 그렇게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단지 '재난영화'의 분류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니, 이 영화를 재난영화라 할 수는 없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어떻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 영화는 숭고한 인간의 의지와 사랑의 현현을 보여주는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라고 말해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통해, 거대한 자연 앞의 인간의 왜소함과 나약함으로 좌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불가항력을 넘어서려는 끝없는 의지와 무한한 사랑을 목격한다. 그것은 마치 고난과 핍박을 넘어 신에게로 향하는 인간의 성스러운 발걸음처럼 보인다.



비행기가 추락사 한 곳, 안데스 산맥 한가운데 끝도 없이 펼쳐진 설경의 풍광은 웅대하고 장엄하게 아름답지만 또한 그만큼 공포스럽게 인간을 짓누르는 이중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영화 속 인물 중 한 명은 그 무한한 광경을 보고 공포에 젖은 얼굴로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공포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그 광경을 우리는 어떻게 묘사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때론 인간이 다 품을 수 없는 그런 장면이 인간 앞에 펼쳐질 때 인간은 또한 한 없이 무력하고 나약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에 짓눌리지만은 않는 도무지 꺾이지 않는 의지를 분출한다. 그리고 그런 꺾이지 않는 생존 의지는 한번 더 나아가 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무한의 사랑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가장 극한의 고통과 고난에서 보여주는 가장 한 없이 무한한 사랑.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거대한 역설의 힘이자 한계를 넘는 깨달음이다.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을 품고 위로하는 신의 성스러운 자비는 인간의 내면에서 확인되고 눈앞에서 드러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또한 한 편의 종교 드라마, 어찌 보면 종교 없는 종교 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한 우루과이 항공기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2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우리의 심장을 시종일관 움켜쥔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참혹하여 때로는 단지 스크린 너머의 일일 뿐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숨을 죽이며 지켜보게 된다. 그러니까 숨죽인 듯 본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만큼 영화의 리얼리티는 뛰어나고 그들이 겪는 참혹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밀도 있고 긴박하게 펼쳐진다. 그러다 문득문득 따뜻한 온돌방에 누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의 나와 이 환경에 안도하고 감사하게 된다. 인간은 또 그렇게 간사하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나의 안위에 안심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스크린으로 눈길을 돌리면 뼛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재난과 고난, 연이은 동반자의 죽음과 탈출 시도의 낭패를 보고 있으면 또다시 숨이 막혀온다. 그리고는 또 이런 생각이 든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저 상황에서 저런 의지력과 의연함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계속 그들과 같이 가상의 고난을 같이 해나가고 있다 보면 깨닫게 된다. 저 극한의 상황이란 것은 상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그것은 내 몸과 정신이, 나의 신체가 온전히 겪어내야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보여주는 눈부신 의지와 사랑 또한 단지 그들 개인의 인격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고 당시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그 의지와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엇, 어쩌면 신의 영역에 속하는 성질의 것, 어떤 신성(神性)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것은 단지 그들 개개인 안에 담긴 성격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숭고한 무엇, 그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과 고난을 만나 비로소 드러나는 신비로운 신성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마치 장대하고 웅장한 자연의 풍광이 너무도 공포스럽지만 또한 눈부시게 아름답듯이, 인간이란 존재 또한 너무도 나약하고 보잘것없지만 그런 장엄한 자연을 만나 자신의 신성을 드러낸다. 신성은 고통을 만나 현현한다.


우리가 어디선가 흔히 듣는 말이다. 고통 없이는 사랑도 없다, 고난 없이는 성취도 없다는 말.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며 거부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들 수도 있고 철학적인 명제로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비로소 알게 된다. 왜 고통이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 왜 고난이 의지를 분출시킬 수 있는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데 인간의 신성이, 아름다움이, 숭고함이 어떻게 깃들게 되는지.



그들의 장엄한 희생과 의지, 사랑 앞에서 영화의 만듦새를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조차 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화의 만듦새를 생각하기 전에 그들의 극한 체험에 같이 숨을 죽이며 몰입해 들어간다는,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거룩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의 뛰어난 작품성과 완성도를 전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 중간중간에 보여주는 안데스 설원의 장엄하고 웅대한 광경, 그리고 공포와 아름다움을 같이 품은 자연의 신비를 응시하게 해 주는 몇몇 장면들은 인물들이 처한 환경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그들의 숭고한 행위를 비춰주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은유가 되어준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처참함 속의 아름다움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것이 태어나는 신비를, 고통과 사랑이 본래 하나의 몸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화자인 인물 '누마'가 동료들에게 남긴 쪽지는 가슴을 크게, 그리고 오래도록 울린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원작: 파블로 비에르시, 『눈의 사회』

각본: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출연: 엔소 보그린치치, 아구스틴 파르델라, 마티아스 레칼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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