넣어뒀던 노래를 꺼낸 것은...
넌 어렸을 때만큼 가을이 좋진 않다고 말했지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맞바꾼 건 아닐까 싶다며
하지만 이 맘 때 하늘을 보면 그냥 멍하니 보고 있으면
왠지 좋은 날들이 올 것만 같아
(가을방학, '가을방학' 中)
요즘 주말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를 본다. 예전엔 개그콘서트를 보며 흥겨운 마음으로 주말을 마무리했다면, 요즘은 '김 부장 이야기'를 보며 트라우마 속에 월요일을 맞이한다는 어떤 댓글에 공감하면서. 드라마 속 김 부장을 보면 내가 직장에서 겪었고 지금도 마주치는 몇몇 인간들이 떠올라 짜증이 치밀면서도, 생각해 보니 나도 머지않아 김 부장과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란 생각에 등뒤가 서늘해지곤 한다. 물론 내가 부장이 될 일은 딱히 없어 보이지만.
드라마 속 김 부장을 보면서, 그리고 회사에서 김 부장 못지않게 고지식하고 고집세고 공감능력 없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저 사람들은 원래부터 저랬던 것인지, 아니면 회사라는 조직이 그들을 저렇게 만든 것인지. 나이 많음을 핑계로 업무와 관련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팀원들에게 잘못된 지시와 책임 전가를 일삼던 팀장과 결국 사무실에서 언쟁이 붙었던 어떤 날, 팀장님은 대체 뭘 하시는 거냐는 내 질문에 '난 너를 관리하잖아!'라고 당당히 말하던 그 사람의 눈빛 속에 최소한의 염치도, 부끄러움도 없음을 보며 이런 인간도 있을 수 있구나를 느꼈던 날이 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회사가 만든 괴물이었던 것일까.
어제 가을방학의 '가을방학'을 듣다가 문득 생각했다. 드라마 속 김 부장이 저토록 고지식하고 황폐해진 것은 노래 속 가사처럼 싫은 것을 참아내는 만큼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에서 떠나보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고. 원래는 그저 조금 고지식하고 단순했던 청년이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험하고 궂은일들을 감내하며 버티는 동안, 마음속에 존재하던 낭만과 감성을 잃어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서울에 집을 가진 대기업 부장이 되었지만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존재가 되어버린,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아저씨들의 모습이 드라마 속에 있었다.
직장생활을 한 지 17년이 훌쩍 지나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그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원래 심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계속 그러기 마련이지만, 성격이 무던하고 괜찮았던 사람들도 힘든 환경 속에서 소위 '빌런'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이다. 늘 밝은 얼굴로 동료들과 잘 지내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웃음을 잃고 표정이 굳어가더니, 후배들 사이에서 꼰대 같다는 뒷담화의 대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대체 회사가 뭐고 사는 게 뭐길래 사람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만약 김 부장을 비롯한 그들에게 충분히 숨을 돌릴 시간이 있었다면, 그래서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분노를 삭일 수 있는 휴식의 기간이 주어졌다면 어쩌면 그들은 변하지 않고 예전의 그 웃음과 여유를 간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회사에서 주는 쥐꼬리만큼의 휴가가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해 푹 쉴 수 있는 그런 방학과 같은 시간이 있었다면 말이다. 우리가 학생들과 선생님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방학이 있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날씨 좋은 계절에, 좋은 공기 마시며 길게 쉴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조금은 덜 변질될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11월이 오고 올해도 저물어 간다는 아쉬움과 일상에서 겪는 짜증이 뒤섞이며 지친다는 생각이 들던 어제, 터덜터덜 집으로 가며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노래를 랜덤으로 듣다가 가을방학의 '가을방학'이 나오는 순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 나에게도 가을방학이란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 피로감은 없었을지도 몰라. 차가워지기 직전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빨갛게 물들어가는 단풍 속을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면 말이지. 나도, 그리고 김 부장도.
가수와 그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를 연결 지어 평가하는 고지식한 나에게는 아픈 손가락 같은 작품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을방학'이란 그룹이 부른 노래들이 특히나 그랬다. 멤버 중 한 명이 얽힌 불미스러운 일은 그들의 노래가 품고 있던 맑고 순수함의 크기에 비례하여 나를 비롯한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주었고, 그 후로 가을방학의 노래들은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져 갔다. 미워도 사람이 밉지 음악에는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오랜 시간 소원해져 있다가 다시 들은 가을방학의 노래는 너무 좋았다.
따지고 보면 계피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옅은 숨소리가 섞인 그녀의 나지막한 음성과 그 음성을 타고 전달되는 예쁜 가사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쉼을 주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설령 그녀가 속했던 그 그룹의 누군가가 얽혔던 일이 그녀의 목소리마저 부정해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그녀의 따뜻한 음성이 담긴 가을방학의 노래를 마음 편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https://youtu.be/_JZtNfmABl4?si=Uq6nhMYqRRNtwv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