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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Nov 08. 2024

모두가 듣는다(by 루시드폴)

'listen' 그리고 'silent'...

영어단어 'listen'은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이고 듣는다는 건 내가 주체가 되는 적극적 행위다. 내가 세상을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를 건네주는 겸손하고도 능동적인 행위다. 그래서 듣는 건 움직이는 것이며 동시에 침묵하는 것이다. 'listen'을 애너그램으로 재조합하면 'silent'가 되는 건 단지 우연이겠지만 말이다.(57p)


술자리에서 열변을 토하며 목이 아플 정도로 얘기를 쏟아내던 때가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하기엔 사실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인지라 멋쩍긴 하지만. 누군가 고민을 얘기하면 조언을 해주고 싶었고, 고통을 토로하면 그 고통을 안겨주는 대상을 함께 욕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맞는 게 아니라는 걸 불현듯 알게 되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어떤 모임이나 집단에서 가장 귀한 존재는 사실 묵묵히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저마다 자기 얘기만 하기 바쁜 모임은 끝나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지 않던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서로의 얘기들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이 각자 하고픈  쏟아내던 연진이 패거리의 모습은 사실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중간에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정리해 주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의외로 쉽지가 않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행위가 아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말들이 재미있을 리도 없고, 보통 우리가 하는 말 중의 대부분은 부정적 내용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이건 물론 내 개인적인 경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그 이야기들을 경청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우린 꽤 늦게서야 알게 되는 것 같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죠?(몇 해 전 네덜란드의 어느 거리에서...)


루시드폴이 저 문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은 말없이 듣는 것의 소중함이 아니었을까. L, I, S, T, E, N이란 여섯 개의 철자가 '듣는' 행위와 '침묵'하는 행위라는 뜻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두 행위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둘 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처럼 자기 어필하기 바쁜 시대에 한 번쯤은 입을 닫고 타인의 말에 귀를 열고 가만히 들어보라고. 그러면 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시드폴의 노래는 늘 내 마음에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며 감동을 준다. '고등어'가 그랬고,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도 그랬다. 하지만 루시드폴이 쓴 이 책은 음악가로서, 농부로서, 학자로 일을 하며 그가 가진 꼼꼼함과 자기 일에 임하는 열정이 페이지 곳곳에 묻어난다. 노래를 들을 때의 그 따뜻한 감성과는 살짝 다른 면모가 보여서 좋았다고 할까. 책방 소리소문에서 업어온 이 책으로 며칠 동안 마음이 차분해진 기분이다. 그 섬세함과 치밀함으로 앞으로 좋은 음악과 글들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의 노래 가사만큼 예민한 감각의 문장들


https://youtu.be/6lejdBm1_rc?si=r4ENXyZpB8QZwPw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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