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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Mar 25. 2024

아빠, 결혼 좀 부추기지 마실래요

남의 속도 모르고

때는 6년 전 봄. 평소처럼 자기 전에 누워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카톡!

 

아빠였다. 밤 열두 시가 넘었는데 무슨 일이지? 불안한 마음으로 얼른 카톡을 열었다.


- 매주 금토 밤 11시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네가 꼭 봐야 할 드라마다. 반드시 보도록.


이건 또 무슨 소리야.


- 왜? 아빠 아는 사람이 그 드라마랑 관계있어?


- 거기 나오는 여자가 남자 꼬시는 법을 알더라. 너도 보고 배워라.


아버지여… 이제 남자 꼬시는 요령까지 코칭을?


아빠는 내가 30대에 들어선 순간부터 결혼을 권했다. 권한 정도가 아니라 강요했고, 압박했다. 엄마와의 결혼생활이 꽃길은 아니었던 걸 뻔히 아는데, 뭐 그렇게까지 추천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내가 30대 중반이 넘어서자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하소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밥 먹으러 가서 식당 사장님한테 "얘가 3X살인데 아직도 결혼을 못했어요. 내가 아주 미쳐버리겠어. 골칫덩이야."라고 하거나, 마트 시식 코너 동그랑땡 이모님한테 "어디 아무 남자 없어요? 얘 결혼 좀 시키게. 그냥 남자면 돼요."라는 말을 함으로써 부아를 고요히 치밀게 했다.


아무 남자라... 다른 집 아빠들은 딸내미가 남자를 데려오면 온갖 테스트를 다 한다고 들었다. 직업, 외모, 집안, 학벌 같은 조건은 기본, 술 진탕 먹여서 술버릇 테스트, 담력 테스트, 체력 테스트, 어학 테스트, 흥신소를 통한 과거 확인(너무 갔나?)까지 꼼꼼하고 면밀히 따져본다는데, 우리 아빠의 조건은 그냥 '남자'면 오케이였다. 외국인도,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돈이 없어도 그냥 오케이였다.


그런데 억울한 건, 아빠는 원래 내 연애에 부정적이었다는 거다. 대학교 1학년,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당시 남자친구가 친구랑 둘이 찍은 사진을 아빠에게 보여줬다.


"아빠 나 남자친구 생겼다! 둘 중 누구일 거 같아?"


아빠는 사진을 슬쩍 보더니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알고 싶지 않아."


그때 받은 충격이 잊히질 않는다. 아빠는 내가 남자친구 있는 걸 싫어하는구나. 이후 난 누굴 만나든, 누굴 사귀든 일절 알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나는 대학교 1학년 이후 남자친구가 한 명도 없는 딸내미였다. (엄마는 내 모든 소개팅과 썸과 남친을 줄줄 꿰고 있지만...)


게다가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독립하기 전까지 통금이 밤 11시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한 시간 반 거리. 나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인 9시 30분에 나와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야 했다. 하루는 9시 40분에 술자리를 뛰쳐나오는데 눈물이 났다. 나도 더 놀고 싶은데, 왜 이 시간에 집에 가야 하느냐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면서 남자들이랑 어울리면서 청춘을 즐기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를 허용받지 못한 것이다.


잃어버린 내 청춘이 사무치게 억울했다...라고 하기엔 솔직히 아빠 몰래 연애할 거 다 하고 실컷 놀아서 별로 아쉬움은 없다.


그러던 아빠가 내가 서른 살이 넘으니 갑작스레 결혼을 요구하는 게 황당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빠를 만족시키려면 서른 살까지 남자 하나 안 만나고, 날 밝을 때 귀가해 조신하게 있다가, 어느 날 스스로 알아서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그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이건 양손을 동아줄로 묶어놓고 밥을 스스로 먹길 요구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루는 작정하고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왜 그렇게 나를 시집 못 보내서 난리야? 알잖아. 결혼해서 다 행복하진 않다는 거."


"너를 신랑한테 넘겨줘야 내가 죽기 전에 할 숙제가 끝나서 그래. 숙제는 해야지.“


"먹여주고 키워주고 용돈 주고 대학교 학자금까지 다 대줬으면 넘치게 한 거야. 아빠 숙제는 진작에 끝났어. 그 말 몰라?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응?"


"아무튼 난 아니야. 너 결혼 안 하면 아빠한테 불효하는 거다."


'솔직히 내 존재 자체가 효도구만'하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제비꽃의 존재를 아빠에게 알렸다. 그냥 알린 게 아니고 결혼할 생각이라고 알렸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만세 삼창을 부를 줄 알았던 아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말이 없었다.


"얼마나 만났는데?"


"1년 좀 안 되게."


"뭐 하는 사람인데?"


"그냥 회사원."


"..."


아빠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래의 사위한테 궁금한 거 없어?"


"글쎄..."


"귀한 딸자식이 결혼한다는데 사위에 대해 궁금한 게 없어?"


"거기... 집안사람들은 어디 사람이야? 지역이."


"고작 그게 궁금해? 그쪽은 할아버지가 북한 분이래."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번에 내려왔대??"


"아니 아빠! 탈북민이 아니고~ 할아버지가 북한 출신이고 6.25 때 내려오셨대. 아빤 왜 이렇게 편견이 없어?"


아빠가 멋쩍게 웃었다. 아빠는 가끔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한다.


이날 이후 제비꽃이 우리 집에 인사를 오고, 내가 그쪽 집에 인사를 가고, 상견례를 하고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식장도 텅텅 비어서 예약도 쉬웠다.


결혼식 일주일 전, 아빠가 결혼식 때 신을 구두를 사러 백화점에서 만났다. 적당히 멋진 구두 두 켤레를 사고 푸드코드에서 밥을 먹었다.


"아빠, 나 막상 시집간다니까 기분이 어때?"


"그냥 그렇지 뭐."


"엄청 좋지?"


"아니..."


"안 좋아?"


"응..."


아빠 표정이 왠지 침울해 보였다.


"웬일이래. 난 아빠가 만세 부를 줄 알았잖아."


"류미야. 결혼 안 하면 안 될까?"


황당했다. 무슨 소리야.


아빠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탁 놓았다.


"무슨 소리야 아빠! 그럴 거면 진작 말했어야지. 지금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취소 못하지. 좀만 일찍 말했으면 안 가도 됐잖아."


"그러게. 아빠 마음을 몰랐네..."


참으로 갈대 같은 마음이었다.


“것봐, 이제 알았지? 아빠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다 잘된 게 아니라는 거.”


‘이게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라고 할 줄 알았던 아빠가 말했다.


“그러네. 정말 그러네.”


아이구 이 양반이 왜 이렇게 약해졌지? 나도 기분이 침울해졌다. 이렇게 나는 되돌릴 수 없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걸까?


"아빠 근데 있잖아… 난 원래 깃털처럼 가볍게 살고 싶었다? 아주 자유롭고, 아주 가볍게… 아무 데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런 부담 없이."


진심이었다. 나는 부담 없이 가볍게 살다 가볍게 가고 싶었다. 그 누구도 의식 안 하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을 진행하면서 이런 바람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은 배우자만 취사선택해서 빼내오는 게 아니었다. 그를 낳아준 부모, 함께 자란 형제, 그와 피를 나눈 이런저런 친척들, 그리고 그들이 몇 대에 걸쳐 쌓아온 문화가 거대하게 몰려왔다. 나는 그 쓰나미를 맞고도 온전히 나로 남을 자신이 없었다.


두렵고,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쌓아온 작고 고유한 세계를 지키고 싶었는데, 결혼을 향해 한발 두발 떼면서 내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을 직감했다. 결혼하고도 내 세계를 온전히 지켜내려면, 새로이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고 새로 만난 가족을 실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죄책감을 감수하느니 포기하고 마는 스타일이므로, 깃털처럼 살기는커녕 푹 젖은 솜이불마냥 땅에 주저앉을 게 뻔했다.


눈치 빠른 아빠가 ‘얘 이러다 진짜 결혼 파토내겠다’ 싶었나 보다. 흐린 눈빛이 또렷하게 초점을 찾고 목소리가 엄하게 변했다.


"쓰읍. 이게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 너 그래도 가야 하는 거야. 알겠지? 잘해!"


아무렴,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가 안 나올 리 없지. 약한 모습 먼저 보인 건 아빠거든요? 참내. 내가 간다, 가. 간다구!!!


그리하여 대망의 결혼식날, 나도 아빠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신부 대기실에서 열받아서 운 거 제외) 씩씩하게 결혼식을 마쳤다.


**아빠,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요... 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보다 외모는 별로지만 꼬시는 스킬은 더 나아요. 무시하지 마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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