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추진력이 필요한 순간

편집증 시대의 연애(20)

by 류미

"저... 류미 님이신가요?"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쯤, 키는 보통, 얼굴은 갸름하고 눈매는 날카로웠다. 근데... 목소리가 좋네?


"네, 맞아요."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제가 급한 통화를 하느라 좀 늦었네요."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어요."


"아 네 그럼... 가실까요? 차를 저쪽에 세워놨어요."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천천히 걸었다. 긴장 반, 설렘 반이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심장이 왜 이렇게 쿵쿵대지?'


"자, 타실까요?"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매너가 좋구나.


"고맙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했다. 그가 차를 빙 돌아서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켜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처음이신가요?"


난 조금 쑥스럽게 말했다.


"네 처음이에요."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여성 전문 운전연수 강사 김성철>


운전연수를 받는 날이었다. 왜 운전연수를 받느냐. 제비꽃이 차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 중대한 사실을 지난주에 통화하면서 알아냈다.


"제비꽃, 나 이번 주말에 어디 드라이브 다녀오고 싶어요. 차 태워줄 수 있어요?"


"아 류미 씨 그게 저... 제가 차가 없어요."


그간 제비꽃이 한 번도 차를 안 끌고 오길래 설마설마했다. 하지만 대놓고 "차 있냐"고 물어보면 속물 같아 보일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드라이브를 핑계 삼아 은근슬쩍 떠봤을 때, 차가 없다는 확인사살을 하고야 만 것이다.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차 없네. 뭐, 나도 없다. 그럼 엄마 차를 빌려볼까나. 15년 전에 딴 운전면허증이 장롱 속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전 남친 대부분이 차가 있었고, 서울에 살면 그다지 차를 끌 일이 없기 때문에 굳이 운전 연습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백수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울해진 나는 기분전환이 간절했다.


이런 이유로 날카로운 눈매의 40대 운전강사에게 연수를 받게 된 것이다.


"운전은 언제 마지막으로 했어요?"


"15년 전이요. 그때 아빠가 운전 연습시켜주다가 의절할 뻔하고 한 번도 안 했어요."


"보통 그래요. 자, 그럼 기본 작동법 알려줄게요."


강사는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친절했다. 그래서 여성 전문 운전연수 강사인가? 브레이크와 엑셀의 위치와 사용법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꼼꼼히 가르쳐줬다.


"운전은 실전이에요. 일단 한번 가봅시다."


"네? 지금 바로요? 제가 운전을 할 수 있어요?"


"엑셀 천천히 밟으면서 하면 돼요. 이 차는 연수용이라 조수석에서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말구요."


"다행이네요. 근데 저 옛날에 도로연수할 땐 차 조수석에 핸들까지 달려 있던 거 같은데, 이건 없네요?"


"착각하신 거 같은데. 그런 차는 없어요. 그럴 거면 그냥 택시를 타시는 게..."


"그래요? 이상하네. 암튼 한번 가 볼게요."


심장이 쿵쾅대고 혈압이 상승하는지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홍제동 사거리는 가뜩이나 복잡한데 여기서 시작한다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괜찮아요. 겁먹지 말고 천천히 운행해보세요."


처음엔 덜덜 떨렸는데,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다 보니 조금씩 감이 잡혔다. 음 역시 나는 적응이 빨라.


"잘하시는 편이네요. 저쪽에서 우회전해보세요."


"네."


핸들을 꽉 잡고 있던 왼손을 살짝 놓고 방향 지시등을 켰다. 똑딱똑딱. 건널목에서 사람들이 다 건너길 기다린 후 스무스하게 우회전을 했다.


"쭉 직진하다가 저 앞에서 우회전하세요."


내가 운전을 좀 잘하는 편인가 보네. 여유가 생겨서 왼손을 슬쩍 놓았다. 역시 운전은 한 손이지.


"두 손으로 하세요."


"네."


강사가 말하는 지점에서 우회전 해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쭉 올라가 보세요."


"이렇게 경사가 심한데 갈 수 있어요?"


"네 갈 수 있어요. 올라가 봐요."


경사가 체감상 한 80도는 되는 것 같았다. 언덕 위에 차들이 서있는 걸 보니 올라갈 수 있는 것 같긴 했는데, 너무 가팔라서 무서웠다. 나는 엑셀을 살살 밟아 경사로를 조금 올라갔다. 그러다가 엑셀에서 발을 떼고 가만히 있었다. 차가 뒤로 쭈욱 밀렸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강사가 식겁하며 브레이크를 잡았다.


"후진 좀 하려고요."


"갑자기 후진을 왜 해요?"


"추진력을 얻으려고요. 차를 뒤로 뺐다가 빨리 달려가면 더 잘 올라갈 것 같아서요."


강사가 잠시 침묵했다.


"신박한 발상이네. 엑셀만 밟아도 잘 올라가요."


아... 내가 좀 무식한가? 문과라서 그래요. 실제로 엑셀을 세게 밟지 않았는데도 잘만 올라갔다. 엔진이 생각보다 힘이 세구나. 엑셀만 밟으면 웬만하면 아무 데나 다 올라가겠어. 운전에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다음날 아침, 눈 찢어진 강사님과 다시 만났다.


"자, 오늘은 자유로를 갈 겁니다."


"자유로는 너무 무서운데요? 속도 제한이 없어서 자유로 아닌가요?"


"...속도 제한 있구요. 지금 시간엔 차가 많아서 60km로도 못 달려요."


"네."


우리의 차는 자유로로 진입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차가 많지 않았다. 나는 강사의 지시에 따라 계속 차선 변경 연습을 했다. 오른쪽 차선으로 끼어들다가 사이드 미러 사각지대 때문에 옆 차랑 부딪힐 뻔하고, 1차선에서 차선 변경을 금방 못해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성질 급하게 빵빵대기도 했다.


심장이 여러 번 철렁해서 다리가 후들후들했다. 우리는 휴식도 하고 주차 연습도 할 겸 일산 하나로마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평일 낮인데도 차가 꽤 많았다.


"자 보세요. 주차의 기본 원리를 알려줄게요."


강사가 종이와 펜, 그리고 장난감 자동차들을 꺼내 주차의 기본인 후방주차, 때때로 필요한 전방주차, 골목에서 필요한 평행주차의 원리를 가르쳐줬다. 생각보다 쉬운데?


그러나 학창시절 과외할 때랑 똑같았다. 들을 때는 아는데 막상 해보면 안 된다. 개념원리랑 정석을 몇 번씩 봐도 수학을 못한 건 응용이 안 되어서인가 보다. 나는 주차장을 뱅글뱅글 돌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주차를 시도했다. 후방 주차 후 차를 빼면서 옆 차를 긁을 뻔했을 땐 강사가 브레이크를 잡아 겨우 막았고, 전방주차는 앞뒤로 수십 번 움직였는데도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강사님은 어떤 주차가 제일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평행주차를 가장 어려워하시더라고요."


"아뇨, 강사님은 어떤 주차가 제일 어려우시냐구요."


"...제가 운전 강사인데 주차가 어려울까요?"


뒤에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모르겠냐구.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란 말이에요. 이럴 땐 잠자코 공감해주면서 "저도 주차가 어려워요. 류미 님만 어려운 거 아니에요" 하면 얼마나 좋아. 우리 제비꽃은 그렇게 말해줄 텐데. 강사는 내가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참내 눈만 쭉 찢어지면 다야? 둥근 얼굴에 둥근 두상, 날카로움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제비꽃이 보고 싶었다.


이로써 이틀간의 운전연수가 끝났다. 눈 찢어진 강사는 마무리를 좋게 하고 싶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류미 님, 운전은 할수록 늘어요. 시간 날 때마다 계속 하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아까 운전하시다가 욕하셨잖아요."


"아, 입속에서만 한 건데.”


"...아무튼 운전하면서 욕하거나 화낼 필요 없어요. 집에 가면 생각도 안 날 사람인데, 괜히 기분 상하면 나만 손해예요. 빨리빨리 잊고 기분 좋게 다니세요. 그래야 더 안전해요.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분노하고, 의기양양하고, 주눅 들고, 재미를 느낀 운전연수가 끝났다. 이제 엄마 차에 제비꽃을 태우고 드라이브 갈 수 있겠구나. 다음 데이트에 갈 곳도 마음속으로 정했다.


'우리의 첫 드라이브 목적지는 강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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