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편집증 시대의 연애(19)

by 류미

"너 그래서 그 뭐냐... 제비꽃? 그 사람이랑 어디까지 갔어?


Y에게 전화가 왔다. 내 핸드폰으로 일방적인 썸남에게 "비가 오네요... 뭐해요?"라고 카톡을 보낸 그녀는 그날 이후 내 연애의 대모 역할을 자처했다. 남자가 없을 땐 연락이 뜸하다가, 제비꽃이 등장한 후로는 자주 전화해 근황을 확인했다.


"손만 잡았어. 아아, 껴안는 것도 했다."


"야. 장난하니? 사귀기 전에 진도를 다 빼는 게 어른의 연애라고 했어 안 했어."


"알고 있지. 근데 이 사람은 뭐랄까... 순수의 시대 같아."


"낼 모레 40인 양반이 순수라니. 혹시 뭐 문제 있는 거 아냐?"


한 살 많은 Y랑은 친자매처럼 터놓고 지냈다. 표면적인 이유는 우리가 성격과 취향(남자 취향 제외)이 매우 잘 통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남자에 대한 비슷한 의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시괴담처럼 수집해오는 다양한 사례는 크게 5가지로 추려졌다.


1. 양다리다.

2. 유부남이다.

3. 변태 성향이 있다.

4. 폭력 성향이 있다.

5. 남성성에 문제가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는 분야는 5번이었다. 5번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모두 직접 확인해봐야 알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너 친구 얘기 잊었어? 네가 소개해준 남자도 문제 있었다며.”


Y는 내 친구 라희를 말하고 있었다. 라희는 내가 소개해준 남자랑 얼마간 사귀었는데, 어느 날 내게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 남자와 헤어지려 한다고.


“왜? 둘이 카톡 프로필에 같이 찍은 사진 올리고 했으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라희가 말했다. 그는 성격도 좋고 자상하고 취미도 맞는단다. 그런데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걸림돌을 발견했단다. 얼마 전 모텔에 가서 역사적인 첫날밤을 보내려는데, 라희는 그의 중요 부위를 보고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라희가 남친의 그것을 본 순간 떠올린 생각은 이랬다.


‘이걸 가지고 이 긴긴밤을 어떻게 보내지?’


얼마 안 가 그들은 헤어지고 말았다. 물론 섹스가 중요하지 않은 여자들은 상대방의 크기와 기능 등등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라희, Y, 나는 그것이 연애 - 더 나아가 결혼 - 에서 꽤 중요한 조건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결혼 상대를 볼 때 수입, 학벌, 자차 유무를 보듯이.


Y 또한 5번과 같은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에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정들기 전에 확인해야 뒤탈이 없다.”


하지만 제비꽃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켜주고’ 있는데 내가 먼저 덮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는 내가 원치도 않는 철벽수비로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이번 주엔 술이라도 먹여서 진도를 나가봐야지. 어두침침한 곳에서 너 한잔, 나 한잔, 너 두잔, 너 세잔... 하다 보면 그도 술기운에 과감해지지 않을까?


토요일 저녁, 우리는 홍대입구에서 만났다.


“제비꽃, 오늘 술 마실래요? 제가 아주 죽이는 와인바를 알아놨어요.”


아주 죽이는? 아잇, 아재 말투 뭐야. 주둥이를 치고 싶었다. 오늘은 섹시함과 농염함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정신차리자.


"좋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비꽃은 순진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오늘의 격전지는 연남동에 있는 백색소음이었다. 지하에 위치한 와인바인 이곳은 어두침침하고 조명이 은은해서 딱이었다. 게다가 곳곳에 책이 많아서 지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에도 좋았다.


"와 류미 씨, 이런 곳 어떻게 알았어요?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친구가 알려줬어요. 우리 저기 앉을까요?"


우리는 와인 한 병과 라구 파스타, 가지 구이를 시켰다. 제비꽃이 여기저기 둘러보며 책을 들춰보고 공간 사진도 찍었다.


"류미 씨, 벽 보고 눈 살짝 내리 깔아봐요."


제비꽃이 핸드폰을 들고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그는 데이트할 때마다 내 사진을 찍어 갔다. 길을 걷다가도 잠시 멈춰서 포즈를 취하라 하고 사진을 찍었다. 밥 먹을 때도 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히는 걸 즐기진 않지만, 그가 날 찍을 때 핸드폰 화면을 보고 웃는 게 기분 좋아서 잠자코 있었다.


와인과 음식이 나왔다.


"짠!"


"짠!"


와인을 홀짝이며 제비꽃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웃는 그의 눈이 귀여운 반달이 되었다.


"크어 맛있다! 라구 파스타 이거 제대로네."

(앗차차 또 아재 됐네. 농염하게 가야 하는데)


"정말 맛있네요. 류미 씨가 데려가는 곳은 어쩜 그렇게 음식이 다 맛있어요?"


"아하하.. 제비꽃이랑 데이트할 땐 맛있는 것만 먹고 싶어서 열심히 찾아봐요."


그렇게 한잔 두잔 와인이 술술 넘어갔다. 와인 한 병을 거의 다 비우니 약간 알딸딸했다. 그러나 제비꽃은 멀쩡해 보였다. 왜 안 취하지? 안 되는데... 그렇다고 이 비싼 와인을 한 병 더 시킬 수도 없고.


그럼 작전을 바꿔야지. 다가오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엥기는 거다.


"제비꽃, 나 좀 취한 것 같아요."


"그래요? 일어나요, 우리. 집에 데려다 줄게요. 류미 씨 집 주소 알려줘요."


경기도민인 그는 늘 막차 타고 귀가하기 바빴기 때문에 나를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없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홍은동으로 향했다. 나는 취한 척 제비꽃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제비꽃은 내 볼을 쓰다듬었다. 음, 분위기 괜찮은데?


택시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3분만 걸으면 우리 집인데... 제비꽃이 이쯤에서 리드를 해야 하는데... '류미 씨, 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요'라든가, '류미 씨, 오늘 밤 우리 같이 있을래요?'라든가, '류미야, 오늘 밤 집에 가지 마' 이런 거 안 하나? (오그라들지만 이게 내 상상력의 한계임)


나는 취한 척 온 체중을 실어 제비꽃의 몸에 기댔다. 그러나 제비꽃은 내 어깨를 짐짝처럼 부여잡고 집 쪽으로 끌고 갔다. 꼭 그렇게 집에 들여보내지 않아도 되는데. 아휴 답답해서 못살겠네. 취한 척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제비꽃, 지금 몇 시예요? 막차 끊기지 않았어요? 어디서 자고 내일 첫차 타고 가면 되겠다."


"택시 타면 돼요. 한 번쯤은 택시 타고 가는 것도 괜찮아요."


사람이 왜 이래. 할증료를 내고 집까지 굳이 택시를 타겠다고? 그럼 꼭 밤을 새지 않더라도 절충안이 있잖아. 어디 구석진 데 가서 키스라도 해, 이 사람아.


그러나 일을 저지른 건 성격 급한 나였다. 그에게 기댔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그의 손을 잡아끌고 모퉁이를 돌았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으슥한 골목이었다.


"이리 와봐요. 아니, 우리가 만난 지가 언젠데 아직 키스도 안 해요?


"아, 류미 씨 저는 천천히 하고 싶어요. 류미 씨를 조금 더 아껴주고..."


나는 대답을 듣는 대신 그의 얼굴을 잡아서 내 얼굴로 끌어당겼다. 키스하면 뭐 안 아껴주는 거야? 속이 터져서 원.


그는 처음엔 놀란 듯 굳어 있었지만 곧 내 입술에 심취했다.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아 보였지만 술을 먹긴 먹었군. 그는 술기운 때문인지 조금씩 과감하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는 달콤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굶주렸…쉬었는지. 이제야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것 같았다.


이십 대 땐 이럴 때 두근대며 키스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난 다르지. 키스하는 와중에도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끝까지는 안 가도 그의 남성성이 문제 없는지는 검증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대놓고 만지면 남자 거기나 더듬대는 변태 여친처럼 보일 수 있다. 섬세하게 잘 해야 하는데... 확인한답시고 너무 정직하게 직진하면 영상통화 처음 하던 날처럼 욕이나 먹기 십상이다. 취한 척하면서 몸을 바짝 밀착시켜볼까? 아니면 손으로 등을 쓰다듬다가 모른 척 손을 앞으로 움직여서...


그때였다. 화아아아-


골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서 있던 차에 라이트가 켜졌다. 이 차... 아까부터 여기 있었는데? 설마 저 안에 사람이 있던 거야? 우리 이러는 거 첨부터 보고 있던 거야?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표정은 안 보였지만 왠지 웃고 있는 거 같았다. 아이씨 저거 뭔데!


제비꽃이 내 손을 잡아끌고 골목을 뛰어나왔다. 그 자리만 피한 게 아니라 아까 택시에서 내린 큰길까지 뛰어 나왔다.


"헉헉. 류미 씨, 저 사람들 우리 다 본 거 같죠."


"네. 아니, 있었으면 기척이라도 하지 뭐야. 이러는 게 어딨어. 변태들 아냐?"


"우리가 변태 같아 보였을 거예요."


술 취한 남녀가 골목에서 뽀뽀 좀 한다고 그게 뭐 변태야...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류미 씨 집으로 가요. 집까지 데려다주고 난 택시 타고 갈게요. 얼른 가요."


“됐어요. 집이 코앞인데 뭐. 택시 타는 거 보고 알아서 들어갈게요.“


착착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에이... 검증도 못한 데다 앞으로 동네 창피해서 얼굴은 어떻게 들고 다닌담. 제비꽃이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장거리라 그런지 3초 만에 잡혔다.


아쉽네, 여러모로.


"잘 가요 제비꽃."


"류미 씨, 오늘 즐거웠어요. 그리고 좋았어요. 류미 씨 마음을 알게 된 것 같아서요."


“다음엔 확실히 보여주세요.”


“네? 뭘요?”


아이쿠 이 주둥이.


“어, 택시 왔다. 얼른 가요!”


그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았다. 택시가 떠나자 난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갔다. 아까 그 골목에 문제의 그 차량은 사라져 있었다. 예끼 이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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