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 검증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

편집증 시대의 연애(18)

by 류미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 활동 반경은 서울 북서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서울 동쪽과 남쪽은 1년에 몇 번 결혼식 때문에 가는 게 다인데, 그나마 결혼식이 없었으면 아예 안 갔을 것이다.


강남과 상관없는 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왜 결혼식은 유독 강남에서 할까? 결혼식 참석 차 강남에 가는 날이면, 차라리 강원도가 더 가깝다 느껴질 정도로 심적 부담이 느껴졌다.


그런 나 류미가, 경기 남부 지방 사람인 제비꽃을 만나고 강동-강남권으로 권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난생처음 건대도 가보고, 10년 만에 롯데월드도 다녀왔다. 이번엔 성수동 서울숲이었다.


"류미 씨, 늦어서 미안해요. 뭐 시켰어요?"


평일 오후 데이트였다. 제비꽃이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로 조금 일찍 퇴근한 덕분이었다.


"괜찮아요. 엘더 클래식 세트 2개 시켰어요."


버거 챔피언이 만든다는 엘더버거 맛 한번 봅시다. 음. 버거는 소문대로 맛있었다. 제비꽃 역시 만족한 표정으로 버거를 와앙 물었다. 그는 입이 특별히 크진 않았는데, 햄버거나 피자는 세 입 컷이었다. 지난번에는 피자 를 먹으며 잠시 얘기하다가 피자판을 보니 세 조각밖에 안 남아 있었다. 난 한 조각밖에 안 먹었는데 피자가 다 어디로 갔지? 제비꽃은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멍을 때리고 있었다. 저기요, 씹고 삼키긴 하는 거예요?


오늘도 그는 엘더 클래식 세트를 3분 만에 먹어치웠다. 그는 다 해치우고 내가 먹는 걸 빤히 보고 있었다. 수제버거는 이게 문제다. 도무지 깔끔하게 먹을 수가 없다. 처음엔 포크와 빵칼을 이용해 조심조심 갈라서 먹었지만, 어느새 다 해체되어 접시에 널브러진 양상추와 양파, 고기 조각을 포크로 모아 집어먹게 된다. 지저분하게 먹는 모습 보여주기 싫은데. 주위를 분산시킬 만한 거 없나?


맞다, 그게 있었지. 예전에 라희가 알려준 사이코패스 감별 테스트가 떠올랐다. 연인이 사이코패스인지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심리테스트였다.


"상대방에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동물이랑, 그 이유를 3가지 대라고 해. 사실 무슨 동물인지는 상관 없어. 왜 멋지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해. 예를 들어 가장 멋진 동물이 호랑이인데, 그 이유가 약한 동물을 잡아 먹어서, 사람을 겁줄 수 있어서, 이빨이랑 발톱이 날카로워서 이런 식이면 위험한 사람이야. 반대로 똑같이 호랑이인데, 이유가 약한 동물을 지켜줄 수 있어서, 털이 많아서 푸근해 보여서 이런 이유라면 괜찮은 사람이지."


100퍼센트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로선 건너뛸 수 없는 테스트였다. 마침 타이밍이 괜찮았다.


"제비꽃, 심리테스트 해볼래요? 재밌는 거 있어요."


평소처럼 '좋아요, 뭔데요?'라고 덥썩 물 줄 알았던 제비꽃이 망설였다.


"왜요?"


"이 심리테스트 되게 재밌거든요."


"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네? 왜요?"


"아니 그냥 좀… 별로더라고요."


세상에. 내가 하자는데 싫다고? 당황했다. 나는 거절에 익숙지 않다. 게다가 맨날 예스만 하던 남자친구에게 거절당하는 건 더더욱. 혹시 심리테스트에서 드러나면 안 될 뭔가를 숨기는 거 아냐?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어때요. 해요."


"흠… 그래요 그럼. 뭔데요?"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걸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제비꽃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동물이 뭐예요? 그리고 그 이유를 세 가지 대봐요."


"글쎄요. 호랑이?"


"이유는요?"


"이유는… 글쎄요. 모르겠어요."


"네?"


당황했다.


"아이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뭐예요?"


"류미 씨, 나 이거 하기 싫어요."


나 이거 하기 싫어요? 아니, 나는 이걸 꼭 해야 한다고요.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니까.


"그래요. 어쩔 수 없죠 뭐. 하지 마요."


싫다는데 계속 밀어부쳤다간 기분 나빠할까봐 한발 양보했다. 쿨한 척 넘어갔지만 기분이 몹시 나빴다.


음식을 다 먹고 나가서 서울숲을 산책하는데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런 한겨울에 왜 여길 오자고 하는 거람.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꽃도 하나도 없고 다리 아픈데 벤치가 더러워서 앉을 수도 있고 사람도 없어서 황량한 느낌만 나고 하늘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칙칙하고 추워서 어디 들어가서 커피라도 먹고 싶은데 여긴 왜 이렇게 넓어서 산책이 끝날 기미는 안 보이고 왜...


"류미 씨, 이리 와봐요."


제비꽃이 갑자기 손을 잡아끌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아까 심리테스트 안 한다고 해서 기분 상했죠?"


"무슨 말이에요. 나 그런 걸로 기분 상하는 사람 아니에요. 그냥 추워서 그래요."


"알아요. 그런데 혹시나 해서요. 그 심리테스트가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이건 알아요. 류미 씨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거기 꽂혀서 나 의심할 거잖아요. 나는 이런 게 함정처럼 느껴져요. 나도 심리테스트 좋아해요. 하지만 류미 씨의 불안이나 의심을 도지게 할 것 같아서 안 하고 싶은 거예요."


"무...무슨 소리에요! 저 그렇게 함부로 의심하는 사람 아니에요!"


팔로 밀어서 품에서 나오려고 했으나, 제비꽃은 힘을 주어 나를 꽉 안았다.


"우리 사귄 기간이 길진 않지만, 류미 씨에게 확신을 주기에는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류미 씨가 지금까지 의심한 거 생각해봐요. 핸드폰 연락처 이름에 하트 안 붙였다고 누구랑 썸타는 거 아니냐고 의심한 거, 이름 잘못 불렀다고 양다리냐고 의심한 거, 영상통화하면서 바지 벗고 있냐고 의심한 거… 이것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이제 좀 믿어줘요. 심리테스트 같은 거 하면서 불안해하지 말고."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사사건건 의심하고 불안해하면 당연히 싫겠지. 그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갈등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데 조심스럽겠지.


물론, 이해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별개다. 나는 한 발 물러선거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코패스 검증은 무해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중요한 관문이니까. 게다가 앞으로 검증할 게 수십 가지였다. 난 괴로워하면서도 돌다리를 끊임없이 두드려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도 제비꽃이 안아주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서울숲을 다 돌고 나와 골목길로 걸어가는데, 왼편에 술집이 보였다. 창문 너머 빔 프로젝터로 켜놓은 에릭 클랩튼의 라이브 실황이 보였다. 나는 제비꽃의 손을 이끌고 술집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공기와 아늑한 조명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크게 틀어놓은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이곳이 완벽한 공간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생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옆 테이블에는 30대 후반쯤 되는 부부와 어린 딸이 앉아 있었다. 고깃집이나 포장마차도 아니고, 이런 술집에서 어린 아이를 본 건 처음이었다. 꼬마는 얌전히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남편은 중요한 얘기를 하는 듯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고, 아내는 접시에 담긴 나쵸를 먹으며 남편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이런 가족이라면, 나도 만들고 싶었다. 퇴근 후 귀여운 꼬마를 데리고 호프집에서 남편이랑 맥주 한 잔 할 수만 있다면. 남들은 쉽게쉽게 결혼해서 애 낳고 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자리를 못 잡고 떠돌아다닐까? 제비꽃도 저 단란한 가족을 보며 나와 같은 생각일까? 그는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비꽃은 500cc 생맥주를 원샷으로 끝내버리고, 다음엔 무슨 맥주를 시킬까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뭐든 한 입이시네. 혹시 전생에 고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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