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커플은 롯데월드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편집증 시대의 연애(17)

by 류미

평소처럼 하루를 마감한 뒤 제비꽃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류미 씨, 저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어디요?"


"롯데월드요."


"좋죠. 나중에 봄 되면 가요.


"아... 음. 아니에요."


"얘기해봐요. 뭔데요?"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뭔데요?"


"다음 주 수요일에 오전 근무만 한대요. 평일이면 롯데월드에 사람이 없지 않을까 해서요. 너무 추울까요?”


"아 그래요? 좀 추우면 어때요. 가요."


제비꽃은 약간의 망설임에도 쉽게 상처받는 성격이었으므로 바로 가자고 말해줬다. 나는 퇴사한 상태라 평일도 괜찮았다. 근데 12월의 롯데월드? 실내는 몰라도 밖에는 많이 추울 것 같은데. 그래, 어차피 이젠 골이 울려서 자이로드롭이나 아틀란티스는 타지도 못하는걸. 실내에서만 놀지 뭐.


수요일 오후. 만나기 몇 시간 전 잠실역 스타벅스에 도착했다. 오전에 이력서를 완성했어야 하는데, 집에선 진도가 안 나가서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이 나이까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을 줄 알았나.


약속 시간이 되자 제비꽃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리번대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인상 좋은 우리 제비꽃.


"류미 씨, 뭐 하고 있었어요?"


나는 노트북을 덮으며 말했다.


"이력서 쓰고 있었어요. 집에서는 잘 안 써져서."


"혹시 더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다 끝났어요. 점심은 먹었어요?"


"네, 회사에서 먹고 나왔어요. 류미 씨는요?"


"저도 여기서 샌드위치 먹었어요. 가요 이제."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롯데월드로 향했다. 롯데월드는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진 롯데월드에 가는 날 며칠 전부터 잠을 설칠 만큼 설렜었는데, 30대 중반 류미에게 롯데월드는 사람 많고 복잡하고 비싼 곳이었다. 그래도 제비꽃이랑 가면 얘기할 시간도 많고 재밌을 것 같았다.


"류미 씨, 짐 줘봐요."


제비꽃이 내 짐을 유료 락커에 넣었다. 안 그래도 노트북 때문에 무거웠는데, 역시 세심하고 착한 남자였다. 락커 키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고, 제비꽃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걸었다. 평일인데도 우리 또래 커플들이 많이 보였다.


앞에서 한 커플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는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쓰고, 위에는 라운드 티셔츠, 바지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여자는 남자만큼 키가 크고, 조금 살집이 있고, 긴 생머리였다. 둘 다 잘생기고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외모였고, 둘 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남의 외모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실례이므로, 나는 그들이 지나간 후 속으로 생각했다.


'외모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사귀는구나. 그게 진리지.'


제비꽃은 속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와...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저런 남자랑 다니지?"


"네? 방금 지나간 그 안경 커플?"


"네, 여자가 훨씬 아깝지 않아요? 엄청 예쁘던데."


그 여자를 폄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나간 커플은 남자와 여자 누가 아깝다고 볼 수 없을 만큼 평범 그 자체였다. 굳이 여자의 장점을 말하자면 긴 생머리 정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예쁜 외모는 아니었다. 그런데 제비꽃은 여자가 훨씬 아깝다고 말하는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다른 여자를 예쁘다고 해서가 아니다.


'저 정도가 예쁘다고? 눈이 이렇게 낮았어?'


나는 나름 외모에 자부심이 있었다. ‘독보적인 미인’이라는 말도 들었을 정도로 (극소수) 매니아 층도 있었다. 어느 집단에 가도 상위 15%에는 든다고 생각했는데, 제비꽃은 상위 50% 정도 되는 외모를 '너무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그렇다면... 나는 제비꽃에게 쓸데없이 고퀄이 아닌가?


"그럼 제비꽃, 보통 어떤 여자를 좋아했어요? 첫눈에 반한 사람을 끝까지 좋아했어요, 아니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차차 좋아하게 됐어요?"


"처음엔 관심이 없어도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거의 다 좋아지더라고요."


맙소사. 거의 다 좋아져? 그냥 여자면 다 좋아하는 남자였네.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는 남자를 보면 첫눈에 yes/no가 정해지고, 그게 거의 평생 간다. 사귈 수 있는 남자와 없는 남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제비꽃은 어떤 여자여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난 그동안 딱 '나 같은 여자'를 원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제비꽃이 내게 대시한 이유가 나 정도 외모, 나 정도 지성, 나 정도 성격을 가진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다가 마침내 찾아서였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비꽃은 나를 운명이라 생각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행복을 위해 사귄 거니까. 꼭 내가 아니어도 됐다면 뭐하러 내가 나한테 접근하는 (거짓말 많이 보태) 수백 명의 남자를 뒤로하고 너를 택한 거냐구.


"류미 씨, 왜 그래요?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제비꽃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그날 소개팅에 누가 나왔어도 사귀자고 했을 거다. 역시 사귀자고 한 날 내가 가졌던 의심이 맞았다.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제비꽃은 이게 왜 이토록 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지 이해 못 할 것이다.


뭐라도 입에 집어넣고 기분전환을 하자.


"우리 밥 먹고 가요. 아까 샌드위치만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요."


눈앞에 보이는 중국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중국집은 내가 고등학교 때도 있던 곳 같은데. 그게 20년 전인데 롯데월드는 참 꾸준하다. 나는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짜장면, 그는 짬뽕을 시켰다. 물과 단무지는 셀프라서 컵을 가지고 뒤쪽 정수기로 갔다. 물을 받아 돌아섰다. 그 순간, 중국집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너무 환해서일까. 빛을 받은 제비꽃의 정수리가 번쩍번쩍하며 그의 둥근 두상이 살색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금껏 데이트할 땐 주황색 조명이 달린 식당이나 어두운 카페를 주로 갔기 때문에 그의 정수리를 볼 일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이마가 벗겨진 스타일은 아니었으므로, 정면에서 보면 숱은 적어도 대머리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이 구도 - 그는 앉아 있고 나는 서 있고 천장의 형광등이 사물을 환히 비추는 - 에서 그는 명백히 대머리였다.


20대 때 남자 외모를 보는 내 3대 조건이 머리숱 많고, 피부 좋고, 모공 작은 남자였다. 제비꽃은 머리숱도 없고, 피부도 그저 그렇고, 모공은 컸다. 왜 나는! 그 조건 좋다는 사람들 전부 다 뿌리치고! 제비꽃을 만났을까! 그것도 꼭 나, 류미여서가 아니라 아무 여자나 상관없었을 이 아저씨를!


속이 상해서 그의 뒷모습을 오래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뒤에서 노려보는 것도 모르고 짬뽕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뒷모습이 어쩐지 짠해 보였다. 갑자기 마음이 슬퍼졌다. 그동안 머리가 없어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저렇게 착하고 섬세한데 탈모인이라는 이유로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딱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서 지나갔다 (막상 그의 인생이 어땠는지 몰랐으면서). 나도 모르게 화가 스르르 풀렸다. 꼭 나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았으면 어때. 내가 행복하게 해주면 되지.


우리는 짬뽕과 짜장면을 먹고 놀이기구를 탔다. 바이킹, 후룸라이드, 신밧드의 모험, 범퍼카... 생각보다 재밌었다. 우리는 추위를 뚫고 매직아일랜드로 나갔다. 절대 안 타려고 했던 아틀란티스도 타고, 자이로스윙과 혜성특급도 탔다. 춥긴 해도 손을 꼭 잡고 있으니 견딜 만했다. 이런 맛에 연인들이 겨울에 놀이공원에 오는 거구나.


어느새 밤이 되었다. 아까의 불쾌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었다. 굳이 분석하자면 분노+불쌍함이 합쳐져 기분 수치가 0이 되었고, 놀이기구를 타서 기분이 극 플러스 상태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집에 갈 때쯤 되자 조금 궁금했다. 우리, 첫키스는 언제 하지? 만난 지 한 달이 넘은 40대 근처의 남녀인데 키스 정도는 이미 하고도 남았어야 하지 않나?


그때 제비꽃이 말했다.


"류미 씨, 우리 퍼레이드 보고 가요."


아하 퍼레이드 보면서 뽀뽀하려고 그러는구나. 로맨티스트네. 생글생글 웃는 그가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우리는 퍼레이드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솔직히 불꽃놀이도 아니고 매일 저녁 하는 퍼레이드가 특별할 리 없지만, 그래도 이런 배경으로 첫키스를 하면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나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몸을 기댔다. 그도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른 쪽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푹 안겼다. 따뜻하고 좋았다. 곧 뽀뽀를 하겠는걸?


그러나 제비꽃은 퍼레이드 내내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인형 옷 입고 춤추는 너구리랑 쥐가 뭐 볼 게 있다고 눈을 떼질 못했다. 어이, 여친이 바로 곁에 있다구. 뽀뽀하려면 지금이 기회야. 빨리!


"류미 씨, 오늘 너무 잘 놀았어요. 덕분에 정말로 행복했어요."


퍼레이드는 허무하게 끝났다. 그는 내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고 손을 잡았다. 그리고 출입구 쪽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저기요, 우리 뭐 할거 아니었어요? 텔레파시를 아무리 보내도 묵묵부답이었다.


경기도민인 그는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하다며, 내게 안녕이라 말하자마자 지하철을 타러 뛰어갔다. 서울 북서부 주민인 나는 2호선을 타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내 기대와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제비꽃과의 연애가 어찌어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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