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가버려(feat.김사월x김해원)

편집증 시대의 연애(16)

by 류미

제비꽃과 영화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그는 마블 시리즈라면 사족을 못 쓰고, 마블 시리즈를 단 1편도 안 본 나는 주로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할 법한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취향이 상반된 우리여도 커플이 됐으면 영화관 데이트는 필수지. 고민 끝에 평이 좋은 '나이브스 아웃'을 보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 약속 장소는 건대입구 롯데시네마였다. 경기도민인 그와 서울시민인 내게 모두 합리적인 위치였다.


"안녕하세요! 많이 춥죠? 우리 얼른 들어가요."


경기도민임에도 항상 나보다 일찍 와서 기다리는 그였다. 활짝 웃는 얼굴로 그는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손이 찬 나는 그의 따뜻한 손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찬 사람은 손이 따뜻하다던…데 아니지. 그는 마음도 따뜻하고 손도 따뜻했다.


우리는 팝콘과 콜라를 사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되고 그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내 팔짱을 끼기도 하고 팔을 쓰다듬기도 하고 손을 깍지 꼈다가 손등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내 팔을 소중한 강아지를 쓰다듬듯 예뻐해줬다. 그러나 이 사랑 넘치는 손길엔 어른의 연애에 마땅한 야시시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메뉴는 멕시코 음식이었다. 소개팅한 날 그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을 때 한식을 좋아한다고 해서 '역시 우리는 취향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이트를 하다 보니 제비꽃은 생각보다 외국 음식을 좋아했다. 베트남, 멕시코, 인도, 중동 음식 등등을 다 잘 먹었다. 다양하게 안 먹어봐서 그렇지 맛에 대한 도량이 넓은 편이었다. 점점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아지고 있었다.


"류미 씨, 여기 진짜 맛있네요."


"그쵸? 누가 추천해줬는데 잘 왔네요. 많이 드세요."


제비꽃은 음식을 싹싹 다 비웠다. 맛있다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기쁘면 활짝 웃었고, 짜증나면 인상을 썼고, 억울하면 슬픈 눈이 되었다. 음식이 맛있다고 연신 말할 때마다 그의 볼에 귀여운 보조개가 푹 들어갔다.


"우리 이제 커피 마시러 가요."


음식점을 나와 카페를 찾아 나섰다. 제비꽃은 기분이 최상으로 보였다. 내 손을 꼭 잡고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조금만 더 걷다보면 스텝에 맞춰 춤을 출 지경이었다.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자기 가슴으로 가져가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오늘은 우리 선미랑..."


???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뭐?"


"류...미. 류미. 류미류미."


"선미라 그러지 않았어요?"


"아 아니에요. 류미. 류미라고 했어요."


선미라고 말한 걸 내 귀로 똑똑히 듣기도 했지만,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입술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곧 심각한 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미가 누구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예 그런 사람이 없어요 주변에."


거짓말. 전 여친이지?


"빨리 말해요. 누구냐구요. 전 여친이에요?"


"믿어줘요. 정말 아무도 아니에요. 모르는 이름인데 나도 모르게 나왔어요."


하아, 그냥 사과를 하지. 잡아떼네?


"모르는 여자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요? 양다리 걸치는 거 맞죠?"


"정말 아니에요. 믿어줘요. 제발... 제발. 제발!"


"하긴, 헤어진 지 10개월 된 전 여친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게 더 이상하지. 양다리가 맞는 것 같은데?"


"양다리 아니에요 제발... 류미 씨 제발. 나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점점 더 빡쳐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친 앞에서 다른 여자 이름을 말한 사건이 네이트판 아니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이걸 가지고 당장 헤어지기는 좀 그렇지만 용서는 못할 거 같은데.


무엇보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날 기만하는 그가 괘씸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하느님께 맹세해요."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


"자, 따라 해요."


"..."


"하느님, 선미라는 사람은 제 전 여친도 아니고"


"하느님, 선미라는 사람은 제 전 여친도 아니고"


"현재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현재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 말이 틀리면 저 죽어서 지옥 갈게요."


"...이 말이 틀리면 저 죽어서... 지옥 갈게요."


어라, 이걸 따라 하네? 전 여친 맞잖아! 나는 이제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전 여친이 확실한데 - 양다리는 아닌 것 같았다 - 하느님한테 맹세까지 하면 내가 더 물어볼 수가 없잖아! 더욱 분해진 나는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고, 붉게 물든 눈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일단 들어가요."


바로 앞에 보이는 커피빈으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앉았다. 절반을 원샷하고는 그의 얼굴을 말없이 노려봤다.


"핸드폰 줘봐요. 연락처 목록 확인해서 선미라는 이름 있으면 우리 여기서 끝이에요."


"..."


그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난감하겠지. 이 난관을 어떻게 타파할지 나는 지켜볼 것이다.


"사실은... 전 여친이 맞아요. 미안해요. 전 여친을 오래 사귀기도 했고, 너무 오랜만에 누굴 만나는 거라 실수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양다리는 정말로 아니에요. 그것만은 믿어줘요."


드디어 이실직고했군.


"근데 왜 거짓말했어요?"


"아까 실수한 순간부터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허무하게 류미 씨를 잃을 수 없어서 계속 아니라고 한 거예요. 정말 미안해요. 용서해줘요. 내가 바보라서 그래요."


열이 받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더 이상 독 짓는 늙은이가 되지 않기로 했다. 작은 흠은 그냥 넘어가자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장점 위주로 보자고 수백 번 되뇌지 않았는가? 예전의 류미였으면 당장 헤어지고 모질게 연락을 끊었겠지만, 이제 그런 걸로 내 연애 인생을 넘어 전체 인생까지 망치지 말자고 결심한 바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 맹세하면서 거짓말을 해요? 가톨릭 신자가. 죽어서 지옥 가면 어쩌려고요?"


"지옥 가야죠, 그냥. 지옥 가는 게 나아요."


어휴... 지옥까지 가겠다는데, 그냥 넘어가자. 딱 한 번만 참는 거다.


"알았어요. 가요 이제. 배고프니까 저녁 먹어요."


둘 다 지쳤기 때문에 배를 든든히 채울 양꼬치에 칭따오를 먹으러 갔다. 내내 의기소침해 있는 그를 보니 또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실수할 수도 있지. 인간적인 실수는 그냥 넘어가자. 양꼬치와 칭따오를 먹으니 알딸딸해져서 '아무려면 어때' 기분이 되었다. 양꼬치에 칭따오가 없었다면 그날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김해원과 김사월이 부르는 '지옥으로 가버려'가 환청처럼 들리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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