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베조스와 캘리포니아 모텔, 그리고 곰돌이 푸우

편집증 시대의 연애(15)

by 류미

제비꽃이 이천으로 1박 2일 교육 출장을 갔다. 제비꽃은 연락처 이름 때문에 싸운 일은 다 잊었는지, 다시 행복한 아저씨로 돌아와 있었다. 아침 일찍 이천으로 떠난 그는 신이 나서 카톡을 했다.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하라고 귀여운 고양이 사진들을 보내줬다.


- 팀장이랑 둘이 가면 어색하지 않아요?


- 아뇨, 안 어색해요. 어차피 한 마디도 안 하고 각자 핸드폰만 보니까.


제비꽃은 팀장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성격이 급하고 짜증이 나면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기 일쑤라고 했다. 아직도 사무실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구나. 제비꽃은 회사에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며, 빨리 탈출하고 싶어 했다.


- 그럼 잠은 어디서 자요? 팀장이랑 한 방 쓰는 거 아니에요?


- 아니에요. 각자 방 하나씩 잡았어요. 그런데 숙소비 비싼 데는 안 된대서 근처 모텔로 잡았어요.


- 모텔 이름이 뭐예요?


- 캘리포니아 모텔이요


큭. 캘리포니아 모텔? 모텔 주인 작명센스 보소.


- 그래요. 교육 잘 듣고 이따 끝나면 연락해요~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엄마랑 저녁을 먹었다. 방으로 들어왔는데 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페이스타임이었다. 아니 이젠 영상통화까지? 왜 이렇게 거리를 유지 못하고 자꾸 훅훅 들어오지? 아직 말도 안 놨는데 영상통화가 웬 말이냐구요.


속으로 조금 짜증 내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인자하게 웃는 둥근 얼굴이 푱 하고 나타났다.


"류미 씨~ 저는 교육 끝나고 저녁 먹고 들어왔어요."


편안한 표정의 제비꽃이 하얀 시트를 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베개 오른쪽 끄트머리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캘리포니아 모텔. 숙소가 모텔이라고 했던 건 아까 말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모텔’이라는 활자를 보니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삼십 댄데 아직도 모텔이라고 하면 야릇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틀 전 싸우면서 절대 이상한 의심이나 상상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팽팽 도는 뇌는 0.1초 만에 많은 것을 연결 짓는다. '의심하면 안 돼!'라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십 개의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가장 강렬하게 떠오른 건 얼마 전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출처는 가십의 여왕 윤정이었다. 윤정이는 자영업자라 바쁜데도 모든 국내외 인터넷 뉴스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있잖아, 곧 이혼할 거래. 근데 이혼 사유가 진짜 웃겨. 베조스가 자기 거시기를 찍어서 여자 핸드폰으로 보냈다는 거야. 곧 기사로 나올 거라는데.”


“미친 거 아냐?”


눈코뜰새 없이 바쁠텐데도 자기 신체 일부를 찍어 보낼 짬은 나는구나. 저런 갑부도 본인의 그곳을 남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많은 남자들이 저런 짓을 하고 있겠지?


근데 지금 이 상황도 좀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모텔-침대-영상통화-얼굴 아래로 보이지 않는 신체. 이 상황이 뭔가 불안했다. 화면에 보이는 제비꽃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외에 다른 부분이 보이지 않으니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고개를 흔들며 망상을 떨치려 애썼다.


'하지만 제프 베조스가 그러리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겠지?'


물론 아니겠지만, 99퍼센트 그럴 리 없지만, 혹시나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만약 속옷만 입고 있으면 어떡하지? 아니면 아예 홀딱 벗고 있다면?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물어보기에는 우린 아직 말도 놓지 않은 사이다. 류미야, 이러지 말자.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아닐 거야. 그러나 그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화면이 흔들릴 때마다 자꾸만 눈이 아래쪽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말야...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확인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진짜 변태면 어떡해? 사귄 지 2주 만에 영상통화를 하는 것도 의심스럽고, 자기 집이 아닌 모텔에 있을 때 첫 영상통화를 하는 것도 뭔가 불안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재치 있게 확인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잘못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오히려 변태 같아 보일수 있다. 차분히 궁리하고 현명하게 말을 꺼내보자.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그러나 미처 입을 틀어막기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바지 벗고 있어요 혹시?"


기분 좋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나도 모르게...


굳어버린 그의 얼굴에 약간의 혼란이 곁들여졌다. 하지만 이왕지사 시작한 거, 나의 안전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저 표정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가 아니라 '들켰구나'의 당혹감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일단 던졌으니 에라 모르겠다, 직진.


"아래 좀 비춰봐요."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나 화면을 선뜻 아래로 비추지 않았다. 왜 안 보여줘? 떳떳하면 왜 안 보여줘? 역시 안 입었네. 가슴이 철렁했다. 근데 벗고 있긴 하지만 이상한 의도가 아니라 그냥 집에서 그러듯 팬티만 입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난감한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럼 어찌 됐든 벗은 거긴 하잖아. 만약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복잡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민망했지만 굳게 버텼다. 계속 어이없는 표정만 짓던 제비꽃이 체념한 표정으로 아래를 비춰줬다. 검은색 긴 바지를 입은 그의 다리에는 살갗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양말까지 신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정색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많이 상한 듯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사실은 체면을 챙기려고)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평소 그가 카톡에서 쓰던 푸우 이모티콘이 바지를 벗고 있는 캐릭터라서 그 이미지가 겹쳐서 든 생각이지, 변태적인 망상은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평소에 그런 이모티콘을 쓰지 말아야죠! 헤헤 미안해용."


그의 얼굴은 더 굳어갈 뿐이었다.




keyword
류미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348
이전 14화회사에 양다리 있는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