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양다리 있는 거 아니에요?

편집증 시대의 연애(14)

by 류미

D+2


보통 사귀면 '오늘부터 1일♡'이기 때문에, 하룻밤 자고 나니 사귄 지 이틀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사귀는 게 맞는 결정일까? 그는 너무나 명백히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핸드폰을 보니 카톡이 와 있었다.


- 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 저는 어젯밤에 오랜만에 운동을 했어요.

- 사진을 보냈습니다.


헬스장이 배경인 사진에는 그의 얼굴이 대빵만 하게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헉!"


순간적으로 카톡을 껐다. 뭐지?


다시 카톡을 켜서 사진을 확대해봤다. 얼굴에 온통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위에 입은 티셔츠는 프리미어리그 어느 구단의 저지 같았다. 아니, 사귄 지 하루 만에 자기 셀카 보내기 있어? 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런 짓을? 게다가 땀 뻘뻘 흘리는 커다란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단 말야.


휴... 이러지 말자. 이제부턴 진짜 장점 위주로 보는 거야. 괜찮아 이런 모습도. 착한 거 같은데 뭐. 생각보다 적극적이기도 하고. 좋다 좋아.


- 운동하셨나 봐요^^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 네 이제 류미 씨 만나야 하니 체력도 키울 겸 운동을 시작했죠~^^


- 그럼 오늘 업무도 잘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네 류미 씨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월요일이라 아침 업무가 많았다. 정신없이 해치우니 어느새 점심시간. 밥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했다. '제비꽃'. 아니, 오늘 아침에 카톡했는데 점심때 또 전화를?


"여보세요?"


"류미씨~"


"왜 전화했어요?"


헛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해버렸다. 너무 훅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네.


"아... 그냥 보고 싶어서요. 점심 드셨어요?"


"아뇨, 이제 먹으러 가려고요."


"뭐 먹으러 가요?"


"아직 안 정했어요."


"그렇구나~ 저는 오늘 점심 안 먹고 운동하러 가요! 열심히 운동해서 살 빼고 체력도 길러야죠."


"아, 네."

(아침에 한 말이잖아...)


"흠흠... (정적) 그럼 점심 맛있게 드세요."


"네 제비꽃도요."


으아 또 정색했네. 무안했으려나? 뒤늦게 미안했다. 그런데 내 기준에선 모든 게 일렀다. 사귀자마자 자기 셀카를 보내질 않나, 아침에 카톡했는데 점심때 또 전화를 하질 않나... 우리는 아직 친하지 않단 말이다. 혹시 결혼이 너무 급해서 서두르나? 나를 결혼을 위한 사냥감으로 보는 건 아닐까?


그렇게 2주를 만났다. 주말에 한번 보고, 매일 저녁 통화했다. 전반적으로 사람은 괜찮았다. 그는 내가 찾던 무해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착하고 무해하고 다정했지만 양다리를 걸쳤던 구남친 두식이가 있지 않은가. 방심은 금물이지. 의심을 쓸데없이 남발할 필요는 없지만, 합리적 의심은 생존에 필수였다.


어느 평일 오후 그와 카톡 중이었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서 이모티콘을 종류별로 쓰며 대화하고 있었다. 하트가 그려진 이모티콘도 보냈다. 제비꽃이 매우 감격했다.


- 첫 하트다!

- 와 오늘 기념비적인 날이네

- 이야... 이거 캡쳐 해놔야겠다

-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는 카톡을 캡쳐한 사진을 내게 보냈다. 응? 이게 뭐야. 그가 캡쳐한 카톡에는 내 이름이 '류미 86 스텔라'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86년생이고 세례명이 스텔라다.


- 나 류미 86 스텔라로 저장했어요? 여자친구를 남들이랑 똑같이 저장하는 게 어딨어요?


- 아 그건 아직 애칭을 못 정해서...


- 근데 그렇다 쳐도 류미 86 스텔라는 그냥 성당 후배 느낌이잖아요


- 헐 아닌데... 엄청 애정 가득한데;;


- 류미 86 스텔라가? 이건 마치 애인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하는 유부남의 연락처 저장 방식 같은데요?


- 아니에요 절대. 지금 애정 넘치게 바꿀게요. 우리 류미♥♡ 이제 괜찮죠?


- 아니 호칭이 문제가 아니구요

- 기분이 좀 쌔하네요

- 애초에 그런 식으로 저장했다는 것 자체가 좀 의심스러운데...

- 혹시 저 말고 또 만나는 분 있는 거 아니에요?


의심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중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의심이니까.


- 그건 진짜 아니다. 류미 씨, 뭐가 또 쌔해요


- 저 진짜 장난 아니구요 진짜 이상해요

- 호칭을 저렇게 해놓는 건 누군가가 여자친구 있는 걸 알면 안 되기 때문 아닌가요?

- 내 이름을 남들이랑 똑같이 저장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 아니에요?

- 혹시 회사에 양다리 걸치는 사람 있어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좀 심했나? 하지만 사귄 지 2주가 넘었는데, 그렇게 좋다고 들이댔으면서 저런 이름으로 연락처를 저장한다? 충분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는 1시간 넘게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카톡이 왔다.


- 류미 씨, 내가 퇴근하고 서울로 갈게요. 이따 나와요.


회사도 집도 경기도인 그가 퇴근 후 나를 만나러 서울까지 왔다. 우리는 경복궁역 스타벅스에서 만나 마주 앉았다. 그는 가만히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쓸쓸하고 슬픈 눈이었다. 나는 무장해제될 것 같았지만, 약해지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게는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


"류미 씨, 나 좀 봐요. 아까 류미 씨 카톡 보고 손이랑 다리가 덜덜 떨려서 혼났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면 안 돼요?"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그래요, 그럴 수 있죠. 내가 카톡을 다 보여줄게요. 일단 이것부터 봐요."


그가 보여준 것은 나랑 사귄 지 며칠 안 돼서 지인들에게 자랑한 대화였다. 여자친구가 너무 예쁘다, 착하다, 행복하다, 다음에 만나면 소개시켜줄게... 회사 동기 단톡방에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한 카톡도 있었다.


"이래도 못 믿겠어요? 의심스러우면 다른 대화들도 봐요. 내가 여자들이랑 의심스러운 대화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명백히 결백했다. 물론 아까 '류미 86 스텔라'를 보았을 때는 명백히 구린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 촉이 빗나가기도 하는구나. 그에게 미안했다.


"미안해요. 내가 예전에 당한 게 있어서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이런 걸로 충격받게 하고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잘됐어요. 오늘을 계기로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거니까. 나를 믿어줘요. 내 마음은 진심이에요. 류미 씨를 정말 많이 좋아해요. 잘해보고 싶어요."


그가 다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나와 옆 시장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먹었다. 화해하고 먹으니 술이 더 맛있었다. 이제 서로 절대 의심하지 말자고, 잔을 부딪히며 맹세했다.


하지만 제비꽃은 몰랐다. 그가 앞으로 맞닥뜨릴 의심과 해명의 길이 남도 삼백리처럼 뻗어 있다는 것을.




keyword
류미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348
이전 13화이 아저씨랑 사귀면 결혼까지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