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13)
제비꽃을 두 번째 만나는 날, 아침부터 보슬보슬 비가 왔다. 만남 장소는 홍대입구역 삼성 디지털 플라자 앞. 여기서 얼마나 많은 소개팅남을 만났던가.
1년 전 이곳에서 만난 소개남이 생각났다. 그날 버스정류장에 내려 디지털 플라자로 길을 건너려는데, 건너편에 젊은 남자 4명이 보였다. 소개남은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던 상황. 저 중 누굴까?
남자1. 위 아래 새빨간 바지와 자켓을 맞춰 입고, 긴 머리가 허리까지 찰랑대던 키 큰 사람.
남자2.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쇼핑백을 든 뚱뚱한 남자.
남자3. 안경 쓰고 키 작고 왜소한 체격에 하늘색 셔츠와 청바지, 눈 부신 하얀 포스를 신은 사람.
남자4. 엄청나게 꽉 끼는 바지에 자그마한 티셔츠, 선글라스 쓴 사람.
눈을 씻고 봐도 30대 남자는 저게 다였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저 중 누구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비관적으로 보였다.
길을 건너 전화를 하니 남자3이 내게 다가왔다. 안경남이었구나. 그의 얼굴을 보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뻔했다. 안경 렌즈의 두께가 2센티미터는 되어 보였고, 눈이 바늘구멍 만하게 축소되어 있었다. 학벌도 회사도 남부럽지 않은 그는 왜 안경 렌즈를 압축하지 않았을까. 혹은 콘텍트 렌즈 낄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그날 그와는 밥만 먹고 금방 헤어졌다.
아차차, 이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지. 길 건너 우산을 들고 다소곳이 서 있는 제비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제비꽃, 멀리 오느라 고생하셨죠!”
우산을 펼려고 하는데, 제비꽃이 내게 우산을 씌어주었다.
“같이 쓰고 가요.”
걸어가며 그를 힐끗 쳐다봤다. 첫날과는 달리 힘들고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런 잔잔하고 평범한 아저씨가 내겐 제격일지 몰라. 성격 무던하고 감정기복이 없는, 푸근한 사람. 그가 핸드폰을 꺼내 음식점 위치를 확인했다. 어, 아이폰이네? 말투나 생김새로 봐선 갤럭시 유저 같은데, 아이폰을 쓰다니 의외였다.
우리는 상수역 근처 인도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빈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첫날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 이상 크게 특별한 면이 있었다. 직업이 특별히 좋거나 기타를 특별히 잘 치거나 아주 다정하거나 얼굴이 잘생겼거나. 그러나 그에겐 특별한 면이 없었다. 음식에 비유한다면 보리빵이나 곤약밥 정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의 장점을 열심히 어필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영화도 많이 보고 피아노도 잘 친다고 했다. 하지만 예전에 만난 사람 중에는 운동선수도 있었고, 영화 칼럼을 쓰는 씨네필도 있었고, 피아노 전공자도 있었다. 내게 제비꽃은 무난 그 자체였다.
“대학원은 박사 학위까지 받으신 거예요?”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강남역 횡단보도에서 본 그 쓸쓸한 표정이었다.
“아뇨, 사정이 있어서 박사는 못 하고 석사만 했어요.”
박사 아니고 석사구나.
박사든 석사든 관심 없었다. 그저 그의 쓸쓸한 얼굴이 보기 싫었다. 아저씨를 웃게 만들어주자. 그때부터 난 텐션을 높이며 재롱을 떨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고 질문 세례를 퍼부우니, 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좋아, 이 기세를 몰아 더 기분 좋게 해주자.
"우리 커피 마시러 갈까요?"
나는 그를 상수동 이리카페로 데려갔다. 이리카페는 처음이겠지? 일요일 오후, 이리카페는 딱 한 테이블 남아 있을 만큼 꽉 차 있었다. 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옆을 힐끗 보니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음악 작업하는 남자, 만화책 보는 학생, 나란히 앉아 팔짱 끼고 있는 여성 커플이 보였다. 남 시선 신경 안 쓰고 각자 좋을 대로 쉬는 이곳이 좋았다.
제비꽃은 이제 할 말이 없는지 조용해졌다. 우리가 할 이야기는 동이 난 것 같았다. 전형적인 이과생인 그와 천생 문과생인 나는 취향과 관심사가 완전히 달랐다. 공통적인 취미도 없고. 이제는 내가 저조해졌다. 역시 사귀지는 못하겠어. 오늘 적당히 얘기 마무리하고 연락 끊어야지.
옆에서 만화책 읽는 학생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혹시 만화책 좋아하세요?”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만화책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을 줄줄 읊었다. 어라? 나도 그 작가랑 작품 좋아하는데?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화책 얘기를 했다. 남은 시간을 때워줄 주제가 나와서 기뻤다. 조금만 시간 끌다가 빠이빠이 해야지.
해가 질 즈음 카페를 나왔다. 오랜만에 학창시절이 떠올라 들떠 있었다. 제비꽃이 흐믓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경기도민이라 먼 길 가야 하는 그를 위해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려주었다. 이렇게 매너 있게 마지막 만남을 마무리해야지.
그때였다.
“류미 씨, 혹시 저랑 사귀실래요?”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그렇지, 소개팅은 세 번 만나고 사귈지 결정하는 게 국룰이다. 왜 두 번째 만남에 갑자기?
“아... 네?”
면전에서 거절하기가 껄끄러웠다. 카톡으로 얘기하지. 그럼 편히 거절하잖아. 내가 망설이자 아까 그 쓸쓸한 표정이 다시 올라와 있었다. 미치겠네.
안경 렌즈 2센티미터 소개남의 애프터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는데, 제비꽃은 단칼에 자르기가 어려웠다. 저런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싫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사실, 한 번 더 만나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무색무취의 그에게 '만화책'이라는 사람 냄새나는 취향을 찾지 않았던가?
사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연애를 쉽게쉽게 하고 끝내는 데 익숙했으니. 하지만 한눈에 반하지 않은 이상 상대의 의심스러운 면을 다 캐보고 검증해야 하는데, 두 번밖에 안 만나 작업을 아직 다 못한 상태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제비꽃이 말했다.
"사람은 실제로 사귀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보통 표면적인 것만 보고 좋아서 사귀는데, 막상 만나보니 안 맞아서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일단 사귀어보고 더 사귈지 결정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그건 그랬다. 처음부터 부담 없이 시작한다니 좀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야 하는 법. 그가 내게 끼칠 수 있는 손해와 위험성을 계산하다가 마침 하나를 찾았다.
"바로 전 여자친구랑은 언제 헤어지셨어요?"
"올해 2월이요."
"그럼 9개월 지났네요. 그동안 소개팅은 얼마나 하셨어요?"
"그 이후로 처음 해요."
"소개팅 처음 하자마자 여자친구가 너무 급해가지고 밑져야 본전으로 사귀자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류미 씨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헤어지고 처음 소개팅에서 바로 사귀자고 하는 건 좀 의심스러워요. 제가 좋아서가 아니라 급해서 그렇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요."
"그럼 류미 씨, 만약 제가 소개팅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으면 뭐라고 했을 거예요? 소개팅을 여러 번 하면서 매번 다 찔러봤는데 안 돼서 류미 씨한테도 들이댄다고 하실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찔렸다. 어떻게 알았지?
"그... 그렇지 않아요. 전 그렇게 아무렇게나 의심하는 사람 아니에요."
(사실 그런 사람이다)
“저는 류미 씨가 좋아서 사귀자고 하는 게 맞고, 우리가 잘 맞는지는 사귀어 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잖아요. 한번 만나봐요 우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주 가볍게 시작해볼까? 이런 무색무취 아저씨도 만나보면 괜찮을지 몰라. 나도 이제 안정적이고 잔잔한 연애를 할 때도 됐지.
무엇보다... 이런 사람이라면 나도 혹시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마초 판별 테스트가 남아 있었다.
"그럼 한 가지 조건을 걸게요. 저보다 3살이 많긴 하지만, 저는 사귀는 사람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아요. 괜찮겠어요?"
이 테스트는 즉석에서 만들었다. 보수적으로 보이는 그가 혹시라도 말끝마다 "오빠가~" "오빠는~" 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참고로 나는 그를 제외한 모든 연상의 구남친에게 꼬박꼬박 오빠라고 불렀다.
"그래요. 원하면 그렇게 해요."
그가 쿨하게 오케이 했다. 보수적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경 안 쓰나 봐. 좋아, 합격.
"그래요, 우리 한 번 만나봐요."
그렇게 제비꽃과의 꽃같은 연애가 시작되었다.
이후 사람은 사귀어봐야 본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건, 그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