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짓는 늙은이는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까?

편집증 시대의 연애(12)

by 류미

나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왜 나만 이렇게 연애가 안 되지? 전생에 연애 못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뭐가 문제야?'


예전 회사 팀장이 내 연애 패턴을 두고 말한 게 떠올랐다.


"류미 대리, 교과서에 나오는 독 짓는 늙은이 알지? 노인이 열심히 독을 지어서 멋지게 완성해.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이 독이 아니야!' 하면서 깨버려. 그러고 또 열심히 막 독을 지어. 이번엔 진짜 완벽해 보이는 독이야. 그런데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 독도 아니야!' 하면서 또 던져서 깨버려. 류미 대리 남자 만나는 거 보면 꼭 그 독 짓는 늙은이 같단 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완전 나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흠 - 심지어 흠도 아니라 어떤 특징 - 을 잡아 내치는 꼬장꼬장한 늙은이.


울적한 마음으로 카톡을 켰다. 오랜만에 소개팅이 들어와 있었다. 소개남 번호로 뜬 카톡 프로필을 눌렀다. 유럽 어느 성 풀밭에 앉아 있는 모습. 환히 웃는 인상 좋은 얼굴보다 불룩하게 나온 배에 더 시선이 갔다. 후, 이러지 말자.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진짜 장점 위주로 보기로 했잖아. 완벽한 남자는 없어. 나라고 뭐 완벽할까?


토요일 저녁, 소개팅 장소는 강남역 어거스트힐이었다. 그는 먼저 도착해 2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2층으로 들어섰다. 심호흡을 해야지. 2층에 테이블은 다섯 개, 그중 남자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은 단 하나였다.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두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카톡에서 보던 그 아저씨, 아니 그 남자 분 맞군. 내가 눈길을 슬쩍 피하자 '저 사람이 아닌가' 하듯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속으로 '나야, 너의 소개팅녀'라고 말하며 그의 앞에 활기차게 앉았다.


"안녕하세요! 제비꽃 님(가명) 맞으시죠? 늦어서 죄송해요."


인사를 나누며 그의 눈을 바라봤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는 어정쩡하게 반쯤 일어나 인사하고 재빨리 앉았다.


"뭐 드실래요? 배 고프시죠?"


그는 내 눈을 피해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그의 입에 함박웃음이 약 0.2초간 걸려 있는 것을. 메뉴판 위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그리고 내리 깐 시선에 긴장이 스며 있는 것을.


외모는 평범했다.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체형, 딱히 진하지 않은 눈썹,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매끈하진 않지만 지저분하진 않은 피부. 그리고 많지 않은... 머리숱. 그는 머리숱이 없었다. 태생적으로 숱이 적은 게 아닌 명백한 탈모인이었다. 과거에 머리숱 없다고 안 만난 남자가 몇이더라.


주문한 새우 파스타와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가 파스타에 든 왕새우를 모두 자신의 접시로 건져갔다. 그러더니 포크와 나이프로 열심히 새우를 깠다. 잘 안 까지는 부위는 손으로 깠다. 그러더니 새우를 전부 내 접시에 놓아주었다. 저기.. 아까 그 포크로 샐러드 먹지 않았나요?


"이거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난 처음 보는 사이에 음식 공유하는 걸 싫어한다. B형 간염 보균자면 어떡해? 더군다나 B형 간염 말고도 침으로 옮길 수 있는 병이 얼마나 많은가. 평소 음식 공유로 인한 질병 전염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나였지만, 긴장한 얼굴로 새우를 열심히 까주는 모습이 고마워서 잠자코 입에 넣었다.


"평소에 강남까지 잘 안 오신다면서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는 와줘서 고맙다며 환히 웃었다. 웃으니까 눈이 반달이 되고 양볼에 보조개가 푹 들어갔다. 음,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직업이 뭐예요? 전해 듣기로는 뇌과학 연구원이라던데.“


"주선자가 그래요? 뇌과학이랑 전혀 관계 없어요. 저는 바이오 쪽 연구원이에요."


"아 그렇군요. 혹시 SK 바이오사이언스나 셀트리온이에요?”


"아뇨, 저는 중소기업 다녀요. 이름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중소기업에 다니는구나.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저는 수도권 소재 OO대학교 나왔어요."


인서울도 아니구나.


내가 남자를 볼 때 별로 신경 안 쓰는 조건이 바로 학벌과 회사다. 대학 안 나온 사람도 만나봤고, 회사는 작아도 월급 200만 원만 꼬박꼬박 주는 곳이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에게 반했다거나 뭔가 플러스 요소가 있을 때지, 소개팅에서는 아무래도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리 멋진 조건을 가지진 않았다.


대화도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그는 나와 달리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영화는 내가 한 편도 안 본 마블 시리즈를 좋아했다. 성격은 진지하고 고지식한 것 같았다. 난 유머감각 있고 티키타카 잘 되는 사람이 좋은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성의 있는 리액션을 해주었다. 내가 취미로 발레를 한다고 하니, 더 얘기해달라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그는 내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글쎄. 굳이 끌림 포인트를 꼽자면 웃을 때 반달이 되는 눈과 보조개? 그리고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매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신논현역 출구 근처 횡단보도에 그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는 앉아 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키가 더 작았다. 한 170센티미터 정도였다. 얼굴 크기와 어깨 넓이를 보고 키가 큰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신호등을 응시하며 조용히 서 있었다. 아까 내 말에 열심히 리액션해주던 남자는 어디로 갔지? 앞을 바라보는 그의 무표정한 옆 얼굴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구레나룻에 듬성듬성 섞인 새치, 그리고 셔츠 칼라 위로 비집고 올라온 목살과 굳어 있는 어깨가 그동안의 삶이 무거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에이, 살찌고 나이 든 아저씨네' 이러고 말았을 텐데, 왠지 이 사람을 조용히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집에 도착한 지 한참 후에야 카톡을 보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설레는 소개팅이 끝나고 버스에서 잠들어 버리다니. 체력조차 늙은이 같아서 마음이 더 짠해졌다.


나는 성향, 관심사, 경제력, 외모 어느 것 하나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남자를 왠지 한 번만 더 만나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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