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밤바다에서 만날래요?

편집증 시대의 연애(11)

by 류미

어느 12월 말, 지인들과 홍대에서 송년회를 마치고 버스에 탔다. 눈송이가 하나 둘 흩날렸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했다. 창밖으로 한 커플이 눈에 띄었다. 롱패딩을 입은 여자가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서 있고, 그 앞에 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숙여 키가 작은 여자의 패딩 지퍼를 올려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예쁜 그림이었다.


나도 저런 그림 속에 있던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친구들과 동해바다에 놀러 갔다.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이 껴서 길었던 연휴, 우리는 2박 3일 동안 게스트하우스에서 놀기로 했다. 바로 앞에 해변이 있어 바다를 보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기가 막힌 곳이었다.


오후 늦게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술부터 꺼냈다. 여행의 시작은 와인이지. 미리 준비해온 플라스틱 와인잔에 와인을 찰랑거리도록 따랐다. 솜씨 좋은 친구가 후딱 만들어온 치즈와 과일 플레이트를 곁들여 한 모금 마셨다. 키야 맛있다!


와인을 순식간에 비우고, 소주와 맥주를 꺼냈다. 수산시장에서 떠온 광어회, 해삼, 멍게, 산낙지를 야외 평상에 펼쳐놓았다. 이로써 호화찬란한 저녁상이 완성되었도다. 해가 지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왁자하게 떠들었다.


한참 먹다가 흥이 오르자 친구 한 명이 기타를 가져와 치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기타 학원에 꾸준히 다니며 웬만한 가요는 모두 섭렵했다고 했다.


그때,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저... 혹시 제가 한 곡 쳐봐도 될까요?"


친구가 흔쾌히 기타를 건네주었다. 그는 우리가 끝까지 올려놓은 텐션에 아랑곳 않고 쳐지는 발라드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 무슨 곡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타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음악 하는 사람인가?


"잘 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기타를 돌려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다시 흥겨운 곡을 연주하며 신나게 놀았다. 소맥을 연거푸 먹다 보니 다들 알딸딸을 넘어 거하게 취해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다시 우리 자리로 와 있었다. 친구가 기타를 한 곡 치면 그가 넘겨받아 또 한 곡을 쳤다. 술 한 잔에 안주 한 점, 기타 연주에 맞춘 떼창…. 해가 완전히 지고 바다 위로 달이 훤히 떴다. 바다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봄 바다 냄새와 음악과 멋진 풍경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혼자 우리 테이블에 온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근데 왜 여기 계속 있어요? 부부동반으로 온 거 아니에요?"


그가 있던 테이블에 남녀 둘씩 앉아 있길래 부부동반으로 온 줄 알았다.


"아뇨, 고등학교 친구끼리 온 거예요. 한 명은 얼마 전 이혼한 돌싱이고, 나머지 세 명은 싱글이에요."


"그러시구나. 친구들이랑 같이 안 놀아도 돼요?"


"네, 괜찮아요."


그는 친구들이 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우리와 함께했다. 밤이 깊어 쌀쌀해지자 우리는 실내로 자리를 옮겨 공동 부엌에서 술자리를 이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작고 둥근 얼굴에 눈은 외꺼풀이었다. 피부는 하얀 편, 볼살이 통통해 어려 보였다. 웃을 때 작아지는 눈이 귀여웠다. 어?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다.


거의 동틀 즈음 자리를 정리하는데 그가 말했다.


"저희는 아침 일찍 서울에 돌아가거든요. 가거든 연락드릴게요."


방에 돌아와 자다가 점심때쯤 일어났다. 그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잠깐 공동부엌으로 나올 수 있어요? 줄 게 있어요."


1시간 전에 온 카톡이었다. 부랴부랴 내려갔더니 그가 식탁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류미 씨 드시라고 닭강정 사 왔어요. 친구분들이랑 드세요."


"고마워요. 근데 서울 일찍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근데 류미 씨 이거 주고 싶어서 가다가 다시 왔어요."


로맨티스트구나. 그 유명한 만석닭강정을 맛 보여주려고 차를 돌리다니. 나는 서울에 돌아와 그에게 연락했고, 어느 저녁 한강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려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나를 보고 활짝 웃는 그가 보였다. 해맑은 눈웃음에 빠져들 것 같았다.


"류미 씨,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어요.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죠."


5월이지만 밤이 되니 쌀쌀했다.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우리는 한강변을 끝없이 걸었다. 이 얘기 저 얘기하며 걷다 보니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는 처음 날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하며, 꼭 사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러자고 했다. 아무리 상대방을 많이 알고 시작해도 실망해서 금방 헤어지곤 했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나쁠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승낙하자 그가 말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좋은 감정으로 시작했어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결혼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류미 씨를 좋아하고, 우리에게 이런 좋은 날이 있었다는 건 평생 죽을 때까지 기억할 거예요.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거니까."


우리의 시작은 행복했다. 모든 연애의 시작이 그렇듯.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서로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퇴근하고 매일 우리 동네로 왔다. 특별한 뭔가를 하진 않았지만, 커피를 마시고, 맛집에 가고, 놀이터에 앉아 얘기하고, 한강변을 산책했다. 주말에는 멀리 있는 맛집에 가고, 멀리 있는 커피숍에 가고, 음악을 들으며 걷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다정하고 섬세한 그는 타고난 로맨티스트였다. 힘든 일은 모두 그가 하고 나는 손 하나 까딱 못하게 했다. 내가 살던 집에서 이사할 때 그는 용달차를 빌려와 이사를 도와주었다. 그날 하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그는 4층을 오르내리며 무거운 짐을 전부 등에 지고 내려 옮겨주었다. 자긴 힘이 좋아서 별로 안 힘들다고 했지만, 밤늦게까지 짐을 풀고 정리를 다 해주고 돌아갈 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역시) 이 연애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버거워졌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나는 점점 불만이 많아졌다. 그는 술을 별로 안 좋아했고, 내가 평소 관심 있는 주제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화하는 건 좋아해서, 데이트하고 헤어지자마자 전화를 걸어 2시간씩 통화했고, 간혹 못 만나는 날에는 4시간 넘게 통화했다. 아무리 친하고 할 얘기 많은 사이라도 매일 네다섯 시간을 대화하면 주제가 고갈되고도 남기 마련이다.


점점 스트레스가 쌓였다. 거의 매일 만나고 통화를 몇 시간씩 하니 다른 친구를 만날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그 또한 나를 힘들어했다. 처음엔 자신감 있게 리드했지만, 내가 마음대로 행동하고 뜻대로 안 되면 짜증을 내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신경질을 내면 그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의 눈물을 보고 당황해서 곧바로 사과했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의 섬세한 마음에 날카롭게 응수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의 사랑은 고마웠다. 그러나 우리의 공통분모는 맛집과 커피와 음악밖에 없다는 게 아쉬웠다. 처음엔 '우리는 맛집과 커피와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역시 잘 통한다!' 하며 연애를 시작했지만, 점차 '우리는 맛집과 커피와 음악 아니면 통하는 게 없다'며 시시해했다.


내가 봐도 어이없지만, 이게 내 허술한 연애의 주된 패턴이었다. 하나를 보고 뛰어들었다가, 이내 싫증을 내고 빠져나오는 것.


어느덧, 봄에 만난 우리는 겨울을 맞았다. 12월이었다. 그는 자신감이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날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퇴근하고 어김없이 우리 동네에 온 그는 나를 파스타집에 데려갔다. 집 근처라 옷을 얇게 입고 나와 조금 추웠다.


화장실이 음식점 밖에 있어서 카운터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나가려는 순간, 그가 나를 붙잡았다.


"류미 씨, 왜 이렇게 춥게 입고 나왔어요.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죠."


그는 입고 있던 롱패딩을 벗어서 나를 입혀줬다. 쭈그리고 앉아 아래서부터 지퍼를 쭉 올리고, 앞에 달린 단추까지 하나하나 잠가줬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알바생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스윗한 남자친구가 또 어디 있을까? 얼굴도 귀엽고 마음도 예쁘고 나를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으쓱한 기분으로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새 음식이 나와 있어 맛있게 먹고,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헤어졌다.


그는 집에 가는 길에 내게 전화해, 미안하지만 헤어지자고 했다. 난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그의 흐느끼는 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이 헤어지는 날이었구나 생각할 뿐.


변명을 하고 싶었다. 섬세한 너의 마음에 상처를 줘서 미안하고,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내가 성격이 모 나서 그렇다. 하지만 무슨 말로도 우리 사이를 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주저하고 또 주저하다 아무 말 못 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속상했다. 아까 파스타집에서 우린 완벽한 그림 안에 있었잖아. 그런 그림을 그려놓곤 꼭 오늘이어야 했을까. 그 파스타집 알바생들은 알까? 그렇게 스윗하던 남자가 바로 그날 여자친구를 차 버렸다는 것을.


나는 그날을 떠올리며,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스윗한 커플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랑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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