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달아서 혀가 녹을 것 같던 연애

편집증 시대의 연애(9)

by 류미

두식이를 만난 건 대학원 영화 모임에서였다.


평일 저녁에 강의실을 빌려 영화 보는 이벤트가 있었다. 이날 선약이 있어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야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두 번 놀랐다. 하나는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는 왼쪽편에 너무 잘생긴 실루엣이 보여서.


마침 잘생긴 실루엣 앞에 친한 동기가 앉아 있었다. 난 잘생긴 얼굴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애쓰며, 친한 동기 옆 자리에 앉았다. 영화를 보면서도 뒷통수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처음 보는 이 남자애는 누굴까? 대학원 사람은 확실히 아닌데.'


영화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눴다. 나는 옆자리 동기와 얘기하다 힐끗 뒤를 봤다. 귀여운 애는 혼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은근슬쩍 인사하며 그를 우리 대화에 끼워넣었다.


“핸드폰으로 재밌는 거 봐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은 최두식. 오늘 친구 따라 왔다가, 친구가 급한 일이 생겨 일찍 가는 바람에 혼자 남았다고 했다.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머리가 멍해질 만큼. 두식이는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를 치고, 사회학을 전공했고, 시카고에 간 적이 있다. 영화도 좋아한다.


집에 가기 전에 그 아이는 쑥스러워 하며 내게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찍어주면서 생각했다. 와 번호교환이 이렇게 쉽다고? 근데 이래놓고 연락 안 하는 거 아냐?


집에 가려고 학교 교문을 나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띵-

두식이었다.


그날 이후, 두식이는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었다. 심심해서 핸드폰을 보면 늘 카톡이 와 있었고, 아침 저녁으로 귀여운 동물짤을 보내줬다. 자주 만나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말이 너무 잘 통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둘이 만나면 대화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식당이 마감하거나, 술집이 문을 닫거나, 막차가 임박했을 때에야 서둘러 일어났다.


내 인생에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둘만 있으면 세상 무엇도 더 필요치 않았다. 노력해서 내게 잘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게 맞게 태어난 사람 같았다. 원래 하나였다가 헤어졌던 것 같은.


우린 사귀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식이는 결정적으로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 재촉하지 않았다. 혹여나 내 불안감이 이 관계를 망칠까 무서웠다. 사실, 불안한 행복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쨌든 옆에 있으니까.


10월 중순, 비가 제법 오는 날이었다. 두식이와 카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우리 관계는 언제쯤 확실해질까?


슬며시 신발을 벗어 발로 두식이 다리를 간질였다. 두식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가 곧 신발을 벗고 발로 내 반대쪽 다리를 간질였다. 나는 책을 보는 척하며 좁은 테이블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점점 앞으로 숙였다. 조금 더, 조금 더. 어느새 내 머리가 두식이의 머리와 맞닿았다. 머리에 살짝 힘을 줘서 밀었고, 두식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머리에 힘을 줬다. 유치한 장난을 받아주는 두식이가 견딜 수 없이 좋았다.


저녁때가 되자, 두식이가 자기 집 1층 상가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로 날 데려갔다. 비가 세차게 와서 바지와 신발이 다 젖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집에 택시를 타고 가나, 버스를 타고 가나 고민하던 차에 두식이가 말했다.


“우리집에 들렀다 갈래?”


나는 그렇게 했고, 그날부터 우리는 진짜 연인이 되었다.


두식이와의 연애는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입안에 든 사탕이 너무 달아서 혀가 녹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싸울 때마저 좋았다. 두식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화를 풀어줬다. 아무리 열 받아도 그가 말이나 편지로 나를 달래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사르르 녹았다. 싸우고 집에 돌아왔을 때, 두식이 카톡 프로필 사진이 내가 펜으로 그려준 두식이 얼굴이고, ‘내가 멍청해서 그래. 류미야 미안해’라는 상태 메시지를 봤을 때, 어떻게 화가 풀리지 않을 수 있을까?


두식이가 알려준 음악도 많았다. 2012년 내게 더 엑스엑스, 베이루트, 더 엔틀러스, 본이베어의 존재를 알려준 게 바로 두식이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 존재했다니. 할 일이 없을 땐 나란히 누워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푸 파이터스의 에버롱은 어쿠스틱 버전이 정말 멋지구나, 오아시스 음악은 언제 들어도 좋다, 콜드워키드와 그룹러브와 패션핏은 앨범을 다 들어봐야겠네. 함께 새로운 음악을 탐험하며 행복했던 시간.


3월 말, 추운 날씨에 함께 제주도를 여행했다. 왼쪽에 바다를 두고 올레길을 걷고 있었다. 해질 무렵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진돗개 두 마리가 나타났다. 배가 고픈지 우리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순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주었다. 둘은 많지 않은 과자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우리 앞에서 한참 머물던 둘은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장난쳤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살짝 올라탔다가 뿌리치고 도망가고, 또 잡으러 가며 겅둥질을 했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길에 우리 넷만 있었다.


“류미야, 여기 마치 세상의 끝 같지 않아?”


정말로 그러했다. 완벽히 고요한 행복. 영원한 해피엔딩이다.


그렇게 세상의 끝에서 돌아왔지만, 우리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난 결혼을 원했다. 그와 떨어지는 건 상상할 수 없었기에 완전히 확실한 관계를 원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었으니 결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이렇게 연애만 3년이고 5년이고 하다가 혼자 남으면 어떡하지? 서른 살이면 이제 안정을 찾을 나이 아닐까?


그때는 몰랐다. 서른 살은 결혼하기에 너무나 어린 나이이며, 내겐 시간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그리고 결혼은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려 7년이 지난 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두식이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자리를 잡기 전 조금 더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돌아보면 그 ‘자유롭게 지내는 것’에는 다른 사람과의 연애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둘의 세계는 완벽한 세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완벽하지 않았다.


균열이 생기고는 있었으나, 완전히 끝난 계기는 그의 배신이었다. 사람의 촉이 무서운 게, 어느 날부터 아무 낌새가 없는데도 뭔가 느낌이 쌔했다. 아주 약간의 단서들 - 내가 다가오면 핸드폰 화면을 꺼버리거나, 카톡 프로필을 바꾼 것, 내게 화를 전혀 내지 않더니 간혹 신경질을 낸 것 등 - 이 있긴 했지만, 그가 허튼짓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내 생일 전날이었다. 두식이는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밤 열 시쯤 연락이 끊겼다. 신나게 놀라고 자기 전에 연락을 안 했는데, 아침까지 연락이 없자 좀 화가 났다. 오늘 내 생일인데 연락이 없어? 화가 난 마음을 꾹 누르며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이제 일어난 거야?”


“응.”


“오늘 내 생일이라 점심 같이 먹기로 했잖아.”


“아 맞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서운해서 퉁명스럽게 몇 마디 던졌다. 그러자 두식이가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류미야, 우리 오늘 안 만날거야. 왜냐면 나 지금 너랑 헤어질거거든.”


뭐? 머리에 띵하게 울렸다.


"무슨 소리야. 너 장난해?"


"아니, 장난 아니야."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였다. 헤어져도 내가 헤어지자고 해야 했다. 내 생일날 감히?


너무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참아야지, 망칠 순 없지. 오늘은 내 생일이잖아.

그러다 문득 근래에 느낌이 쎄했던 게 기억났다.


“두식아... 너 혹시 다른 사람 만나니?”


“그건 왜 물어?”


“그 정도는 얘기해줄 수 있잖아. 그래, 네 말대로 헤어지자. 그렇다면 이유를 얘기해주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잖아. 나 정말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봐.”


두식이는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랬다고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솔직할 줄은 몰랐다.


세 달 전, 나랑 두식이, 내 친구 두 명과 야구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두식이는 전날 술을 엄청 많이 먹고 아침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러고는 야구장에 늦게 나타났더랬다. 바로 그 전날밤이 그날이었다. 그 여자와 바람이 난 날.


그날 두식이는 어쩌다 알게 된 여자랑 저녁을 먹고 2차로 어느 술집에 갔다. 그리고 3차로는 아주 즐거운 밤을 보냈다. 그 모든 걸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었는데,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부탁에 두식이는 여자와 어디서 어떻게 놀았는지 속속들이 말했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다. 듣다 보니 둘의 질펀함이 일반적인 수위를 넘었다 싶어 ‘그러다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라고 쓸데없이 참견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너무 억울했다. 화가 나는데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게다가 내 생일날? 이렇게 끝낼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시청역으로 나와.”


생일 아침, 세수도 안 하고 떡진 머리 그대로 집을 나와 골목길을 뛰어내려갔다. 시청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눈물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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