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 때문에 우리는 만날 수 없어(2편)

편집증 시대의 연애(8)

by 류미

주말에 함께 저녁을 먹고 기분 좋게 산책하고 있었다. 평소 수다스러운 그가 주로 말하고, 난 들어주면서 맞장구 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다가 가벼운 말다툼으로 번졌다. 장난처럼 그에게 물었다.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예상과 달리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즉시 경보등이 켜졌다.


"왜 대답을 안 해?"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뭐?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무슨 소리야? 사귀자며? 네가 내게 고백한 날, 우리가 얼마나 깔깔대며 즐거워했는데. 나에 대한 마음 하나는 확실한 거 아니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곧바로 나와야지, 이렇게 뜸 들인 것도 모자라 조금 생각을 해본다고? 난 슬퍼졌다. 난 슬프면 화를 낸다.


"됐어 그럼! 나랑 안 만나면 되겠네!!"


소리를 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그는 아무 일 없는 척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그를 차단했다. 전화가 왔다. 내선번호를 보니 그였다. 받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 그가 따라왔다. 무시했다. 나는 그 정도 마음을 가진 남자랑은 만날 수 없었다.


연인이 내게 갖는 마음은 온전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야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려서 그랬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이 철저하게 이상적인 사랑관을 못 버렸다)


나는 그와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후, 그가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는 정말 미안하다며, 꼭 할 말이 있으니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쓰여 있었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봐야 할 필요는 있었다. 회사에서 매일 마주치는데 이대로 지내기 불편했다. 깨끗이 정리해야지.


그와 강남역에서 만났다. 저녁을 먹으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 그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넘어가지 않겠어.


"그래서 할 말이 뭐야?"


"류미야... 그날 일은 정말 미안해. 상처 주려고 한 건 아니었어."


"됐어. 내가 물어봤을 때 나한테 즉시 좋아한다고 대답했어야 했어."


"너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야.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어."


"뭔데?"


"그냥... 몰라도 돼. 하지만 중요한 건 아냐. 난 너를 좋아해."


"그게 무슨 이유냐구."


"아냐... 이러지 말구.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기분 풀어."


"그게 뭐냐니까."


"아냐... 류미야. 안돼."


대체 무슨 이유길래 30분이 넘게 말을 안 해? 사내연애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구여친과 다시 만나게 돼서? 내가 너보다 학벌이 달려서? 그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사랑이고 충실한 마음이고 필요 없고, 오직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류미야 제발..."


"그러니까 뭐냐고! 대체 뭔데 그렇게 말을 못..."


"다리."


"뭐?"


"니 다리가 두꺼워서 망설였어."


....뭐? 뭐 임마? 다리?


니. 다리.

방심하던 장수가 적군의 칼에 급소를 찔리면 이런 느낌일까?


두꺼워서. 망설였어.

동네 양아치한테 삥을 뜯기면 이런 기분일까?


내가 상체에 비해 다리가 좀 두껍긴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다 늙은 몸뚱이 다리가 늘씬하건 두껍건 무슨 상관. 이젠 롱스커트 입고 다닌다. 하지만 삼십 대 초반까지 내 굵은 다리는 커다란 콤플렉스였다.


난 모멸감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가 나오자마자 그는 곧바로 따라나왔다. (계산은 했니?) 난 쳐다보지 않고 도로에 나가 택시를 잡으려 손을 들었다. 그가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류미야, 헉헉. 들어봐. 제발."


돌아서서 아무 말 없이 노려봤다.


"류미야, 있잖아, 내가 여자 다리를 많이 보거든. 이상형이 다리 예쁜 여자야."


그럼 나랑 왜 사귀자고 했어 애초에? 여전히 한 마디도 안 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널 만나고 그게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귀자고 한 거야. 널 좋아해."


상관없다고? 근데 왜 말했어? 아무리 캐물어도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지! 다리? 뭐? 다리?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는 주눅 든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였다.


빵빵-


차 한 대가 우리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주차할 거니까 우리더러 비키라는 거였다. 지금 분위기 안 보여? 싸우고 있는 거 보면 몰라? 본네트 위에 방패처럼 생긴 앰블럼이 붙어 있었다. 포르쉐였다.


빵빵-


가뜩이나 빡치는데 어딜 빵빵대. 부자면 다야? 눈에 뵈는 게 없는 나는,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도록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아니 xx 지금 싸우고 있는 거 안 보이나 xx 그냥 저쪽으로 xx 이 xxx들아.”


차 유리 너머로 커플이 우릴 보며 웃고 있었다. 저것들을 죽일까? 나는 차도 없고 다리가 두꺼워서 길바닥에서 남친과 싸우는데, 쟤네는 포르쉐 타고 데이트하면서 빵빵대고 다니네.


"류미야 왜 이래, 그만해."


"가만있어! 어디서 사람한테 빵빵대고 있어! 포르쉐면 다야?"


그들은 잠깐 그러고 있더니 다른 자리를 찾아 가버렸다. 포르쉐 커플은 가면서도 우릴 보며 웃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하며 끝까지 쳐다봤다. 갑자기 그가 보도블럭에 털썩 주저앉았다.


"류미야, 나 숨이 안 쉬어져. 헉헉."


"무슨 소리야. 불쌍한 척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아냐 정말... 정말 심장이 아파. 숨이 안 쉬어져."


그가 인상을 팍 쓰고 왼쪽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정말? 괜찮아? 어떡해 119 부를까?"


"아냐 난 누가 화내면 숨이 안 쉬어질 때가 있어. 좀 있으면 낫거든? 그러니까 잠깐만 있어줘."


난 그의 곁에 힘없이 앉았다. 분노는 걱정으로 바뀌고, 이내 서글픔으로 바뀌었다. 다리가 두꺼워 슬픈 동물. 엄마 왜 내 다리를 이렇게 낳아주셨어요? 나도 날씬한 다리를 가졌으면 더 행복한 연애를 했을 텐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도 안 보이고 흐리기만 했다. 가을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연애하기 좋은 날인데, 왜 나는 남친이랑 포르쉐랑 싸우고 신세한탄을 하고 있지?


나만 이렇게 연애가 힘든가? 나도 사랑받고 싶다. 다리가 날씬해서가 아니라, 얼굴이 이뻐서가 아니라, 같은 팀 F4의 아가리 미인대회에서 우승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서 내게 오는 사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대를 이만큼 갖고 시작했던, 설레고 짜릿했던 사내연애도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날 숨 못 쉬던 그는 금세 멀쩡해져서 집에 돌아갔고, 회사도 건강한 몸으로 근속했다는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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