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 때문에 우리는 만날 수 없어(1편)

편집증 시대의 연애(7)

by 류미

이십 대 중반에 취업한 회사는 나름 규모 있는 중견기업이었다. 대기업에 줄줄이 낙방하고 겨우 붙은 회사였다. 하늘이시여, 그리 성실하게 살았는데 결과가 고작 중견입니까.


하지만 입사 동기들 스펙을 보면 나보다 성실하게 살았는데 종착지는 같았다. 하소연을 했다가 '너 정도도 아쉬워하는데 난 어떻겠냐'며 귀에서 피가 나게 욕먹을까 봐 그냥 묵묵히 다녔다.


우리 팀은 회사에서 크게 존재감 없는 팀이었다. 나름 힘 있는 파트에 속해 있었지만, 정체성이 약간 모호해서 다른 팀에서 이일 저일 가져다 하면서 덩치만 키운 팀이었다. 당시 다른 동기들은 2~3명씩 같은 팀에 배정받았다. 나는 발령받은 팀에 바로 윗 사번이 4명이나 있는 관계로 혼자만 달랑 들어가게 됐다.


윗 사번 선배 4명은 모두 남자였다. 호오. F4네. <꽃보다 남자: 중견기업 편> 찍는 건가? 4명 모두 장악하진 않아도, 4명이니 25%의 확률로 1명과 연애를 꿈꿔볼 만 하겠구먼.


이것은 대학을 막 졸업한 자의 철없는 기대라는 것을, 회사원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난 첫 출근하는 날 즉시 알 수 있었다. 젊은 남자 직원 4명은 그냥 젊은 남자 직원 A, B, C, D일 뿐, 연애 상대와는 백만 광년 떨어져 있다는 걸.


A는 홀쭉한 얼굴에 마른 몸, 머리는 ROTC처럼 짧게 자르고 다녔다. 그 나이에도 과자를 좋아해 업무시간에 과자를 끊임없이 먹었다. 그렇게 먹는데도 마른 걸 보면 몸매는 체질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배는 나와 있었다. 그리고 A는 여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B는 작은 키에 웃는 모습이 귀여운 선배였다. 그는 매우, 매우, 매우 깔끔했다. 책상은 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먹은 지 이틀 지난 종이컵까지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책들과 서류철을 키를 맞춰 정리했고, 다이어리에 쓴 글씨마저 명필이었다. 참, 그리고 B는 여자를 몹시 좋아했다.


C는 키가 한 18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한 90킬로그램쯤 나가는 듯했다. 통통과 뚱뚱 사이의 몸이었지만 정감 있는 인상 덕분인지 둔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재주가 좋고 붙임성 있어 회사 내에서 발이 넓었다. C는 나를 잘 챙겨줘 메신저로 대화도 자주 하고 다른 팀 사람들에게 날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C는 여자를 좋아했다.


D는 유부남이었다. 그리고 여자를 좋아했다.


어쩜 그리 하나같이 여자를 좋아하는지, F4는 점심 먹을 때마다 여자 얘기로 꽃을 피웠다. 내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어디 팀 누가 예쁘네, 누가 요새 스타일이 좋아졌네, 동기 누구는 요새 외모가 저조하네, 엇 근데 저기 1시 방향 여자 예쁘네... 나는 잠자코 들으며 그 여자들 중 단 1명도 F4에게 관심이 없을텐데 참 덧없이 열정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C가 업무시간에 날 데리고 분식집에 갔다. 옆팀 동기랑 가끔 업무 시간에 떡볶이를 먹는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C의 동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키, 뿔테 안경, 작은 키를 커버하려는지 약간 띄운 헤어스타일이었다.


'흠. 스타일은 말끔하네.'


분식집까지 걸어가서 떡볶이를 시킬 때까지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래도 옆팀에 새로 온 후배면 뭘 물어보든 해야지, 쳐다보지도 않아? 그는 C랑만 계속 얘기를 나눴다. 떡볶이가 나오고 나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어쩐지 내게 눈길도 안 주는 그 선배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 과장님은 지금 뭐 한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대화에 끼어들어 말을 던졌다. 그 선배가 처음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약간 놀란 듯 동그란 눈, 갸름한 턱, 하얀 피부. 그때 생각했다.


'내가 너는 좋아할 일이 없겠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날 이후 자꾸 그가 눈에 밟혔다. 날 한번도 쳐다보지 않던 그에게 묘한 오기가 생겼다. 날 쳐다보게 만들어주겠어. 하지만 난 나를 잘 알았다. 그날 분식집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사실 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마음이 생겼으면 행동해야지.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엿봤다. 옆 팀에 서류를 전할 일이 있으면 꼭 그에게 건네줬고, 업무 관련 문의한다며 메신저도 종종 했다. 그리고 C를 공략해, 우리 팀 F4와 그가 함께하는 술자리에 날 데려가도록 손을 썼다. 회식이 끝나면 집이 같은 방향이라 함께 가면서 얘기도 많이 나눴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내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이 정도면 넘어올 만도 한데. 애가 탔다.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매력이 없는 걸까? 아님 정녕 회사는 연애 불모지인 것일까?


모르겠다 이제 슬슬 포기해야지 하던 어느 날. 모니터를 보다가 커피를 들이키며 살짝 고개를 돌린 순간, 난 보았다. 파티션 너머로 날 보고 있던 그가 급히 시선을 피하는 것을. 난 속으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삼켰다.


그때부터 일사천리였다. 그도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였다. 얼마 후, 그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내 번호를 저장해갔다. 그날 이후 그가 매일 저녁 연락했다. 나는 (보안을 위해) 그의 이름을 톰이라고 저장했다. 행복했다. 내게 눈길도 주지 않던 그가 마침내 내게 온 것이다.


그를 많이 좋아했다. 그는 여자들한테 인기 있을 타입은 아니었다. 말 많고 호들갑스럽고 키도 작고. 하지만 그는 내 취향에 딱 맞았다. 그의 동그란 눈, 잘 어울리는 뿔테 안경,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 늘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무엇보다 그의 향수 냄새가 좋았다.


대부분의 사내 커플이 그러겠지만, 우리 사이는 비밀이었다. 회사에서 몰래 눈빛을 주고받고 티 안 나게 서로를 챙겨줬다. 컴퓨터 배경화면을 우리만 알 수 있는 사진으로 바꿨다. 회식이 끝나면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같은 택시를 타고, 사람들이 뒤로 멀어지면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주말이면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 일 없는 교외로 나가 데이트했다. 사내연애는 지루한 회사 생활의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내게 문제없는 연애가 있었던가? 역시 문제가 생겼다.

keyword
류미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348
이전 06화변호사님 오신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