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님 오신날

편집증 시대의 연애(6)

by 류미

"누나는 어떤 남자 만나고 싶어?"


"글쎄... 인성 좋고, 계산적이지 않고, 사랑이 끝나도 의리로 내 곁을 지켜주고, 능력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믿음이 가는 사람. 예를 들면…"


“누나는 퇴계 이황쯤은 만나야겠다.”


맞아. 퇴계 이황. 조선에서 알아주는 학자이며 애처가로 소문난 사람. 그런 사람이 딱이지. 동생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긴 있어?


그 즈음, 변호사님이 오셨다.


"언니, 아는 오빠 중에 변호사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로스쿨을 졸업하고 유명 로펌에서 일하는 신입 변호사라고 했다. 변호사? 내가... 변호사님을?


변호사라는 단어는 발음마저 멋졌다. 난 깨달았다. 주위에 변호사가 없어서 그랬지, 나 좋다는 변호사가 있었다면 이미 그와 결혼해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나가서 잘하면 결혼도 가능하지 않을까? 변호사 와이프라. 멋진 타이틀에 어깨가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변호사님은 신사역 근처 파스타집으로 장소를 잡았다. 난 이날 야상에 청바지를 입지 않았다. 원피스를 입고 화장도 곱게 했다. 파스타집에 들어가자 문 앞 테이블에 한 남자가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머리가 작고 마른 전형적인 왜소한 남자였다. 저것이 변호사적인 외모구나. 의자에는 에코백이 걸려 있었다. 의외로 소탈하시네.


테이블 앞 의자를 끌어 당겨 앉으며 활기차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소개팅 나오신거 맞죠?”


그 남자가 나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아닌데요.”


"아... 변호사님 아니세요?"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근데 아니면 아니지 저 불쾌한 표정은 뭐야? 너도 내 스타일 아니거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안쪽을 둘러봤다. 조금 뒤쪽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듬직한 체격, 둥근 얼굴, 가느다란 눈, 성격 좋은 웃음.


“안녕하세요. 혹시 K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그의 앞에 조심스레 앉았다. 변호사님은 못 참겠다는 듯 쿡쿡대며 웃었다.


"혹시 저 실수하는 거 보셨어요?"


"네. 아, 너무 재밌으세요."


내가 뭐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구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허당처럼 보였겠네. 휴...


오랜만의 소개팅이어서일까, 아니면 변호사님이어서일까? 좀 떨렸다. 처음엔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 말을 아꼈으나, 곧 긴장을 풀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 우리 변호사님은 똑똑하신 데다 활동적이었다. 걷는 걸 좋아해서 국토대장정도 했고, 1년에 한 두번은 지리산과 한라산에 오른다. 책도 좋아하고 주말에는 예능 프로를 챙겨 본다. 술은 센 편이지만 절제하며 평소 술 약속은 많지 않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변호사님은 머리와 신체의 완벽한 조화, 이성과 감성의 어우러짐, 술을 즐기면서도 친구를 과하게 좋아하지 않아 밖으로 나돌 가능성까지 적은 아주 건실한 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와의 결혼 생활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날 이후 한 번 더 만났지만 그에게 마음이 확 가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굳이 꼽자면… 피부가 그렇게 좋진 않았고(그래봐야 모공이 조금 큰 정도), 얼굴이 좀 큰 편이었다(그래도 어깨가 넓고 키가 커서 비율상 괜찮았다). 그리고 옷차림이 약간 공대생 스타일이었다(말하자면… 체크무늬 셔츠?) 순박하게 웃는 모습이 순수해 보이고 맑았지만, 이성적인 끌림은 없었다.


이후 그를 몇 번 더 만났다. 그의 됨됨이가 생각보다 더 좋고 성격도 꾸밈없다는 점은 만날수록 확실해졌지만, 여전히 마음이 가지 않았다.


‘류미, 너 대체 왜 이래?’


정신 못차리는 딸내미 혼내는 엄마처럼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아쉽고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용기를 내어 그에게 죄송하다고,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좋은 사람 만나시라고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에게서 '알았다'고 답장이 왔다가, 이내 전화가 왔다. ‘미안하지만 류미 씨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몇 번만 더 만나보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보통 이런 경우 연락을 단칼에 끊지 않나? 그런데 변호사님은 말을 번복하면서까지 자존심을 버리고 날 붙잡았다.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구나 싶었다. 이렇게 나를 아껴주면서도 능력 있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조금 더 만나보자고 생각하고, 그러자고 답했다.


그 다음 데이트는 <어둠속의 대화>였다. <어둠속의 대화>는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서 시각 대신 다른 감각으로 공간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예전에 <어둠속의 대화>에 와봤다는 친구는 ‘외모를 포함해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곳에서 깨달았다’라고 말하며, 잘생긴 남친만 만나다가 정반대 외모의 남자와 결혼까지 했다.


호오, 그래? 이곳에서 우리 사이에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관람 시작. 관람객은 모두 커플이었다. 모두 둘씩 짝 지어서 어둠속을 더듬으며 걸어다녔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아무것도 안 보였다. 암흑속에서 나는 두려워졌다.


‘변호사님이 은근슬쩍 손을 잡으면 어쩌지?’


이 상황에서 그가 손을 잡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는데 아직 손을 안 잡은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간절히 바랐다.


‘제발 손을 잡지 말아주세요…’


우리 앞뒤 커플들은 꼭 붙어 다니며 예상 못한 이벤트에 꺄아 꺅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변호사님 손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손이라도 스칠까 양손을 내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 칠흑같이 어두워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시야가 확보되었다면 내가 그를 얼마나 멀리 피해 다녔는지 보였을 것이다.


관람이 끝나고 가이드가 우리에게 말했다.


“두 분은 따로 오신 분들 같아요 ㅎㅎ”


그때 깨달았다.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은 것이란 걸. 능력 있고 성격이 좋다고 해서 이성적인 감정이 생기는 건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꾹 참거나 부추겨서 생기지 않는다.


그날 집에 들어와서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에겐 안 보이지만, 미안한 마음에 무릎 꿇고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적어내려갔다. 그 역시 장문의 문자로 답했다. 아쉬움과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지만 담담하게 내 마음을 알겠다고 말했다. 내가 장시간 그를 간 본 것에 비해 너무나 젠틀하고 사려깊은 반응이었다. 역시… 됨됨이는 내가 본 게 맞았다.


허탈했다. 됨됨이와 능력도 아니라면 난 어떤 사람을 원하는 걸까?


확실한 결론은 퇴계 이황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끌림이 없다면.


이래서야 이번생에 인연을 만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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