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시대의 연애(5)
4월 말, 아직 좀 쌀쌀한 저녁이었다. 다른 친구와 한잔 하고 이태원에 나타난 윤정이는 달큰하게 취해 있었다. 모름지기 술은 1차로 끝내는 게 아니지. 나랑은 2차로 시작했으니, 4차까지는 제대로 놀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태원 나잇의 흥겨운 시작은? 당연히 부기우기지. 올댓재즈가 사라진 이태원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재즈 바 부기우기 아닌가. 출입문에 들어서니 은은한 비밥 재즈가 들려왔다. 오늘 어떤 아티스트가 나오는지 몰라도, 늘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곳이므로 무대 바로 앞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피아노가 주축이 된 트리오의 공연은 꽤 좋았다. 금요일 밤을 적당히 달굴 정도의 텐션이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우린 맥주를 한 병씩 천천히 비웠다. 이미 술을 먹고 온 윤정이는 조금씩 더 취해가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드디어 이태원의 밤이 궤도에 올랐구나. 나이가 30대로 접어든 후에는 클럽을 가려면 이태원으로 가야 했다. 수준 높은 우리 귀에 흡족할 음악을 튼다...는 이유를 들고 싶지만, 사실 30대인 우리가 입뺀이라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피하려면 이태원이 유리했다. 이태원에서 나름 이름 난 클럽들 - 케익샵, 콘트라, 피스틸 등 - 을 물색하다가 케익샵으로 결정했다.
지하에 위치한 케익샵은 어둡고 담배 냄새로 공기가 매캐했다. 클럽에 오기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윤정이랑은 음악이랑 춤만 즐기러 클럽에 가기 때문에 - 물론 누가 다가오면 스캐닝 후 조금 놀긴 하겠지만 - 옷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상태였다. 우린 맥주를 들고 춤을 췄다. 상당히 취한 윤정이는 특유의 댄스에 도취되어가고, 나는 오랜만의 이태원 나들이에 점점 신이 났다.
“같이 노실래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경 쓴 남자애가 서 있었다. 아담한 키에… 사실 다른 용모적 특징은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독보적인 특징이 있었다. 바로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는 스킨헤드였다. 얼굴은 앳되보이는데, 분명 탈모 때문에 밀었을 테다. 미안하지만 안돼. 난 머리숱 많은 남자가 이상형이란 말야. (그러나 몇 년 후 나는 탈모 아저씨와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고개를 숙이고 춤에 심취한 윤정이에게도 굳이 묻지 않은 건, 스킨헤드가 윤정이보다 3센티미터 정도 작았기 때문이다. 우리 윤정이가 정수리가 내려다보이는 남자에 관심 있을 리 없지. (그러나 몇 년 후 윤정이는 자신보다 3센티미터 작은 남자와 결혼하고야 만다)
나는 머리를 굴려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아 미안한데, 전 레즈비언이고 얘는 제 여자친구예요.”
춤만 추러 왔다느니, 너한테 관심 없다느니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다양성의 천국 이태원에서 이보다 예의바르고 납득 가능한 거절이 또 있나. 내가 견딜 수 없이 멋지게 느껴졌다. 스킨헤드는 매너 좋게 물러났다.
윤정이와 계속 춤사위를 이어갔다. 20대 땐 더 오래 놀았던 것 같은데,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역시 젊을 때 놀아야 한다. 황금 같은 청춘날, 부모님과 함께 살며 통금시간에 맞춰 울면서 귀가하던 시절이 분했다. 그때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고 맘껏 놀러다녔다면 - 밤늦게까지 술 먹고 사람들이랑 놀고 사고도 좀 치고 애도 좀 생기고 그랬으면 - 명절 때마다 짐짝 취급 안 당해도 되는 것 아닌가.
착실한 딸은 훗날 늙은 뒷방 처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시름거리가 됐다는 사실.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결과가 다 좋은 건 아니다.
말없이 춤을 추다 슬쩍 고개를 들어 윤정이를 봤다. 이번엔 윤정이 옆에 한 남자가 와 있었다. 아까 그 스킨헤드는 아니었다. 키는 한 178센티미터 정도에, 어두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외모 실루엣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윤정이 얼굴을 보니 싫은 눈치도 아니었다. 흠 그럼 슬쩍 빠져줄까.
윤정이는 오는 남자를 막지 않고 둘만의 땐스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난 댄스의 스탠스는 유지하며 뒷걸음질 쳐 뒤쪽으로 빠졌다. 몇 개 없는 입식 테이블에 기대서 맥주를 마시며 둘이 노는 걸 지켜봤다. 목이 말라서 맥주가 홀짝홀짝 잘 들어갔다.
“저기요”
뒤를 보니 비니 모자를 쓴 젊은이(내 기준)가 서 있었다. 앳되 보이는 얼굴에 큰 눈, 피부도 좋고, 키는 작지만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왜요?”
“맥주 한잔 하실래요?”
나쁘지는 않은데… 윤정이도 잘 놀고 있으니 얘기나 좀 해볼까.
“그럴까요?”
후드티를 입은 걸 보니 쟤도 나처럼 춤만 추러 왔다가 심심해서 말 건거 같은데, 나같이 안 꾸민 여자한테 다가온 걸 보니 검은 마음으로 접근한 건 아닌 듯했다.
그는 나를 바로 데리고 갔다. 나는 바에서 메뉴판을 보고 병맥주를 하나 골랐다.
“전 하이네켄이요.”
젊은이가 하이네켄과 자기 몫의 칵테일 한 잔을 시키고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 처음 오셨어요?”
“네, 처음 왔어요.”
“전 가끔 와요. 주말에 약속 없고 할 일 없을 때요.”
바텐더에게서 술을 받은 그가 내게 하이네켄을 내밀었다. 짠! 가볍게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마셨다. 클럽에서 남자랑 술을 다 마셔보네. 어린애긴 하지만 나름 즐겁구나. 학생은 칵테일을 들이키며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비니를 잡아 슬며시 벗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소름이 돋았다.
아까 그 대머리였다.
시선을 돌려 윤정이를 돌아봤다. 몇 분 전만 해도 내 여자 애인이었던 윤정이는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어린 학생을 속였다는 부끄러움, 이 정도로 얼굴 인식이 안 된다는 자괴감….
그중 자괴감이 95%를 차지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여기서 얼굴 헷갈린 걸 들키면 끝장이다. 나를 뭘로 보겠어. 치매 초기인 줄 알 거 아냐. 나는 원래 너인걸 알았지만 그냥 따라온 척을 했다.
대화가 이어졌지만, 난 학생의 눈을 못 마주치고 그의 어깨 너머 먼 곳을 응시했다.
"전 연극과 문학을 전공하고 있구요, 근처에 살아요."
"아 그러시구나."
"여기가 음악을 잘 틀어서 춤 추기 좋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오늘은 친구랑 오려고 하다가 친구가 일이 생겨서 혼자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저기 여자친구는 남자 분이랑 잘 되어가는 거 같은데요?"
"아 그러…네요."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자연스러운 대화에 급속도로 피로해진 나는 문학적인 연극 보이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플로어에 들어가 한껏 취한 윤정이 손을 잡아 끌고 나왔다. 밤이 깊어 조금 더 쌀쌀해진 공기. 잡히지 않는 택시를 겨우 잡아탔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눈이 멀쩡히 달렸는데 이렇게까지 사람을 못 알아볼 수 있나? 나중에 이혼한 남편이 볼에 점 찍고 나타나면 다시 연애할래?
나 자신에 대한 분노로 씩씩대는데, 윤정이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잠 들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봄바람이 들어왔다. 그래 재밌게 놀았으면 됐지 뭐. 대머리 꼬마는 '좀 모자란 아줌마였다'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나는 괜찮다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내 여자인 친구 윤정이의 머리에 내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