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왜 자꾸 옆구리를 슬쩍슬쩍 만져요?

편집증 시대의 연애(3)

by 류미

20대 중반, 취업 후에는 대학생 때와 달리 자연스러운 만남이 적어졌다. 그때부터 소개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소개팅은 많이 들어왔지만 잘 안 됐다. 조건이 괜찮아도 얘기를 나눠보면 갸우뚱한 경우가 많았고, 딱 맘에 드는 사람은 애프터를 신청하지 않았다.


애프터를 못 받은 건 내가 소개팅에 안일하게 임한 탓도 있다. 화장을 최소한만 하고 청바지 차림으로 나가곤 했으니. 당시 난 꾸며서 예쁜 건 진짜 예쁜 게 아니라는 희한한 신념이 있었다. 매 소개팅마다 미용실에서 드라이를 하고 가는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 공들여 꾸며야 한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수수한 매력은 일단 마음을 얻은 후 뽐내도 늦지 않다는 걸 왜 몰랐을까.


소개팅이 잘 안 되는 데는 내 기준이 좀 독특한 이유도 있었다. 기준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게, 그때그때 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원하는 남자는 이상하거나 위험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 '무해한 남자'였다. 그러면 폭력 성향이 있거나 욱하는 성질의 남자만 거르면 되렷다. 그러나 난 사소한 어떤 특성을 위험의 가능성으로 비약해 연결시켜 많은 남자를 밀어냈다.


- 화장실을 자주 간다.

=>소변을 자주 보는 남자는 전립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 뷔페에서 내게 접시를 챙겨주지 않았다.

=>배려가 부족해 결혼하면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 같다.


- 시집간 동생에게 연락해 집으로 피자를 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결혼하면 내가 일일이 다 챙겨줘야겠구나.


- 친구들과 노래방 갔다 중간에 연락이 끊겼다.

=>유흥에 심취해서 내 존재를 잊는 사람은 필요 없다.


- 집안에 돈이 많다고 어필한다.

=>돈 많다고 자랑하는 남자는 나를 업신여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뭐가 이상한지 모를 일이다. 당시에도 친구들은 내게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질 것을 권했다.


“뷔페에서 접시를 안 챙겨줬다고? 뷔페는 전쟁터야. 누굴 챙길 겨를이 어딨어. 접시는 직접 챙겨야지.”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너 그럼 그 사람이 반대로 화장실을 안 가면 뭐라고 할 거야? 그 사람이 화장실을 안 가는데 너~무 이상하지 않냐고 그럴걸?”


“돈 많은 남자한테 업신여김 받는 게 낫지, 나중에 가난한 남자랑 결혼해서 일용직 나가봐야 정신 차릴래?”


이리하여, 이유는 많지만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남친 없는 시기가 길어졌다.


어느 날, 소개팅에서 한눈에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 3년 차 은행 직원. 키는 크지 않지만 얼굴이 귀엽고 눈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매너 좋고, 직업 확실하고, 사는 동네 가깝고, 게다가 기타도 잘 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상상마당 근처 파스타 집에서 만나 스테이크랑 파스타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평소 새침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이 날은 포커페이스가 잘 안 됐다. 하하호호. 즐거웠다. 무엇보다 이 날도 청바지 차림에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았지만 소개남은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 외모보다 내면의 매력을 알아보는 진국일세.


두 번째 만날 땐 원피스를 입었다. 마음을 정했으니 본격적으로 잘 보여야지. 이번 만남에서는 이 사람이 정말 사귈 만한지 면밀히 확인해야 했다. 첫 만남에선 매너가 좋았지만 가식일지도 모르고, 혹시 술 마시면 변하는 스타일인지도 몰랐다. 술을 왕창 먹여서 이 사람이 진짜 남친감인지 알아봐야지.


약속 장소는 창전동에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였다. 노란 전등을 켜놓아 운치 있고 술 셀렉션이 다양한 곳. 분위기도 에스닉해서 술맛을 돋웠다. 테이블에 자리 잡고 맥주부터 시켰다. 오늘 만남에서 기필코 네가 괜찮은 남자인지 아닌지 밝혀낼 거야.


술을 한잔 두잔 하는데, 너무 마음이 급했나? 자꾸 술을 먹이려는 걸 눈치챘는지 약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저기, 왜 이렇게 술을 급하게 마셔요?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먹어요.”


눈치가 빠르시네. 자고로 술은 급히 먹어야 취하고, 취해야 본성이 나오고, 본성이 나와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확인할 수 있지 않겠니.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리듬이 절묘했고, 눈빛 또한 그윽했다. 이 사람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이러다 오늘 고백하는 거 아냐? 검증은 아직 안 끝났지만, 술을 마시다 보니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었다. 에이 몰라, 그냥 만나지 뭐.


연거푸 들이키다 보니 취했다. 이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실히 취했다. 우리는 술집에서 나와 상상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타나서 소개남이 ‘이쪽이에요’ ‘저쪽이에요’ 하면서 나를 이끌었다. 걷다 보니 서로 어깨가 부딪혔고, 팔이 스쳤다. 흠? 우리 벌써 잘 되어가나?


이 상태로 손을 잡으면 확실하게 사귀자는 표시겠지. 중간에 여러 번 손등과 손등이 스쳤으나, 소개남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기대하던 손은 안 잡고, 방향을 바꿀 때마다 오른쪽 허리춤에 살짝 손을 대고 왼쪽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렸다.


손길이 불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고로 마음에 들면 손을 잡아야지, 이렇게 간 보듯이 어깨 등 허리에 손을 대는 게 어디 있어? 난 어깨와 허리에 살짝씩 스치는 그 손길이 정정당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면 손을 덥썩 잡아야지 왜 간을 보니? 혹시 비겁한 사람인가? 난 비겁한 사람 싫어한단 말야!


나는 멈춰 서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술기운에 눈이 약간 풀린 게 느껴졌다.


“저기요. 근데 왜 자꾸 옆구리를 슬쩍슬쩍 만져요?”


소개남이 약간 당황하는가 싶더니 피식 웃었다.


“하하. 왜 자꾸 옆구리를 슬쩍슬쩍 만지냐고요?”


나는 소개남이 ‘관심 있으니까 그러죠! 그럼 당당하게 손을 잡을게요’하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걸어갔다. 마침내 큰길이 나왔다. 소개남이 택시를 잡더니 나를 밀어 넣고는 조심히 들어가라고 매너 좋게 웃었다.


그리고 영원히 연락이 없었다.


“야 그렇게 철벽을 치는데 누가 좋다고 하냐? 너야말로 호감 있던 거 맞아?”


“당연하지. 나야 사귈 준비 완료였지.”


“보통은 관심 있으면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 돌려 말하거나, 네가 손을 잡든가 하지.”


“마음이 있으면 얍삽하게 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손을 잡아야지. 그것이 관심 있는 여자에 대한 태도 아냐?"


친구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그놈의 정정당당의 선은 누가 정해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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