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네요… 뭐해요?

편집증 시대의 연애(2)

by 류미

지수를 알게 된 건 연남동 채널1969였다. 윤정이와 나는 밤에 슬리퍼를 끌고 종종 이곳을 찾았다.


그날도 독특한 춤사위를 펼치는 윤정이를 바라보며 진토닉을 마시고 있었다.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여자였다.


“혼자 왔어요?”


작은 얼굴에 짧은 단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진하고 까만 눈동자. 생긋 웃는데 눈이 너무 예뻤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난 이성애자인데 어쩌지. 그러나 나조차 약간 사심이 생길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였다.


“아뇨, 친구랑 왔어요.”


내 시선을 따라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움직였다. 윤정이는 여전히 음악에 심취해 있었고, 곁에선 힙스터 동지들이 DJ의 인도 하에 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저 남자친구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바람맞았어요.”


바람이라니. 이런 공주님을?


나는 바에 기대 서서 공주님과 대화를 나눴다. 공주님은 프로그래머이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리지만 작은 스타트업 대표로 있었다.


이름은 송지수. 그날 이후 지수와 자주 어울렸다. 지수의 사무실에 놀러가고, 같이 공연 보고 술도 마시러 다녔다. 지수는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내가 남자 없이 지내는 게 딱했던지 아는 오빠들을 소개해줬다.

딱히 잘 되진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지수를 만나러 종로에 갔다. 내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 맥주 한잔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져 보란다.


약속 장소는 권농동 서울집시. 나름 보헤미안 스타일로 하얀 셔츠에 린넨 롱스커트를 차려입고 나갔다. 먼저 도착해서 맥주를 한잔 시켜 홀짝였다.


“언니!”


지수는 등산복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사람들이 뒤따라 들어와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는 두 명이었다. 그중 소개받을 사람은 키가 더 작고 더 착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날 소개받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와는 개인적 대화 없이 다 같이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 돌아가는 길에 지수가 말했다.


“그 오빠가 언니한테 확실히 관심 있어. 내가 알아.”


“그래?”


사실 그가 사람들 얘기를 잘 들어주는 걸 봐서 매너가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내게 관심이 있는지는 애매했다. 나도 마음이 확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예전엔 첫눈에 느낌이 안 오면 바로 끝이었는데, 내게 관심 있는 것 같다는 말에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삼십 대 중반에 다다라서 그럴까?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지수네 사무실에서였다. 지수네 사무실은 으리으리했다. 층별로 중간이 뻥 뚫려 있어, 4개 층이 통으로 한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지하에 있는 응접실은 척 봐도 비싼 가구와 소파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높이까지 LP판이 꽂혀 있었다.


이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LP를 가져와 틀었다. 어? 나도 저 아티스트 좋아하는데. 트렌디하면서 목소리 좋고, 연주도 잘하는 신예 아티스트였다. 그날 사람들과 모여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각종 술을 마셨다. 나는 옆에 앉은 이 남자와 음악, 직업, 가족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우리의 대화는 중간에 끊기지 않았다.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많았다. 취향도 비슷하고, 책도 많이 읽고, 인성도 좋은 것 같고, 매너도 좋고. 이렇게 내 얘길 잘 들어주는 걸 보니 내게 관심이 있는 게 확실했다.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됐다, 됐어.'


술을 꽤 마신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카톡이 와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이제 다 된 밥이었다. 이제 썸 타다가 사귀면 되겠다. 기분이 좋아져서 카톡창에 답장을 했다. 어차피 잘 되어가는데 굳이 더 친절할 필요는 없지.


-네 저도 즐거웠어요. 좋은 밤 보내세요!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카톡이 와 있겠지? ‘잘 잤어요?’라든가 ‘좋은 아침이네요’ 같은. 아니면 ‘오늘 만날래요?’ 요런 ㅋ


근데, 없었다. 정오가 지나고, 오후 3시가 지나고, 밤 9시가 되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왜 연락을 안 하지? 일요일이라 그런가? 아냐, 쉬는 날이면 더더욱 연락을 해야지. 아냐, 이틀 연속으로 연락하기가 좀 부담스러울 수 있어. 기다려 보자.


그렇게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지났다.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초조했다. 아니, 초조해지기 시작한 건 일요일 저녁이었고, 수요일 오전이 되자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내향형 인간이라 내게 연락하는 데 좀 뜸 들일 수도 있잖아? 집안에 일이 있을 수도 있고 핸드폰이 고장났을 수도 있어. 내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심해서, 급한 일이 있어서, 심지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라고 생각하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저녁 약속이 있는 수요일 저녁, 비가 억수로 왔다. 가을인데 무슨 비가 이렇게 철철 올까. 호우 경보가 내렸다. 하지만 술 약속을 미루는 건 옵션에 없지. 산울림소극장 건너편 산울림1992에서 여자 셋이 모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Y와 K였다.


나는 술집에서도 죽상을 하고 있었다.


“뭔데 그래. 빨리 말해 봐.”


Y와 K에게 2주간 있었던 일을, 어떤 부분은 내게 약간 유리하게, 어떤 부분은 내 착각을 단호히 깨주길 바라며 털어놨다.


“야야 다 필요 없고, 네가 먼저 연락해.”


내가?


지금껏 삼십몇 년 삶에 남자한테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남자들은 관심 있으면 먼저 연락하기 마련이고, 관심 없는 사람을 먼저 찔러봐야 결과가 좋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상대방에게 ‘나는 네게 관심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어필하고, 상대의 최종 선택에 맡기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사귄 남자들, 다 내가 꼬신 거야. 뭘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 일단 다가가서 자빠트려야 돼.”


Y는 남자들을 수없이 자빠트렸던 자신의 연애사를 1시간에 걸쳐 들려줬다. K와 나는 Y의 수완과 과감함에 입을 떡 벌렸다. 그녀가 원했던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수중에 들어갔다. 저것이 어른의 연애구나. 난 아직 고딩 같은 연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 줘봐. 상황 파악해보게.”


Y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Y는 우리가 지금껏 나눈 카톡 대화를 휙휙 넘겼다.


“흠…. 확실히 초식이가 맞네.”


그러다 카톡에 타닥타닥 타이핑을 하더니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이었다.


“뭐야! 카톡 보냈어?? 안돼!!!”


Y가 의기양양하게 핸드폰을 건네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폰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비가 오네요…. 뭐해요?


“으악! 언니 미쳤어??”


너무 당황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쳐다봤다.


“이렇게 끈적하게 다가가야 돼. 이거 분명 연락 온다. 나만 믿어. 내가 남자를 얼마나 꼬셨는지 말했잖아. 이거 백퍼 연락 와.”


억울하고 부끄러웠다. 내 체면은 어쩌고! 삼십 대 중반까지 지켜온 나의 도도함! 나의 자존심!


그러나 Y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니 믿어보고 싶어졌다. 메시지를 보낸 시각은 밤 9시. 막걸리 한잔 마시고, 카톡을 확인하고, 또 한잔 마시고, 카톡을 확인했다.

밤 10시 넘어까지 메시지에 1이 없어지지 않았다.


“…안 보는데?”


“기다려 봐.”


그렇게 또 한잔 두잔 마시며 확인 또 확인했지만 답장이 없었다. 1도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1이 안 없어져.”


“그래? 이상하다 그 사람.”


Y는 방금 나온 파전을 쭉쭉 찢어 입에 넣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밤 12시 넘어서까지 1이 없어지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누워서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여전히 1은 없어지지 않았다. 집에 우환이 있다고 생각하자. 안 그럼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답장이 와 있었다. 오전 9시였다.


-안녕하세요! 어제 일찍 잠들어서 이제 카톡을 봤어요. 비가 많이 와서 잠이 오더라고요 ㅎㅎ


끈적한 문자에 이런 발랄한 답장이라니. 그리고 무슨 9시에 잠을 자. 거짓말. 얼굴이 시뻘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를 1퍼센트의 희망을 가지고 카톡을 이어나갔다. 그래, 체면은 무슨 체면. 이미 버린 몸. 그리고 정말 일찍 잠들었을 수도 있잖아?


카톡이 몇 번 오고 가다가 그는 실낱 같은 희망을 싹둑 잘라버렸다.


-다음에 기회 되면 다 같이 한번 봐요.


‘다 같이’라.

‘기회 되면’이라.

모든 희망과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성질이 나서 Y에게 화면을 캡처해서 보내줬더니 답이 가관이었다.


-야 뭐 그런 게 다 있냐? 버려라 그냥. 그런 건 줘도 쓸모없어. 남자 구실이나 하겠어.


이 무책임한 인간이...! 수치스러움과 분노와 억울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악!!!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이제 와서 ‘어제 그 끈적한 카톡은 내가 아니었다. 난 그런 여자가 아니다’라고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그런 여자가 뭔데. 밤에 비가 오니 문득 네가 궁금했다고 말하는 게 뭐 그리 이상하다고. 나야말로 솔직하지 못하고 방어적이었던 게 아닐까. 모든 게 명확해지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조바심 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단칼에 싹둑 잘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래야 나도 미련 없이 또 누군가를 찾아 떠나지.


가느다란 희망보다는 확실한 불행이 때론 나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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