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원하는 것은 오지 않는다

편집증 시대의 연애(1)

by 류미

내 이상형은 명확했다. 자유로운 성향의 전문직. 나처럼 문화예술을 좋아하고, 술이랑 음악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내키면 훌쩍 여행을 떠나고, 돈도 잘 벌어서 몇 년 바짝 모으면 집도 살 수 있는 사람.


이야말로 수십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이상형 아닌가.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가 말했다.


“야, 그런 사람이 어딨어. 있다 해도 뭐 죄졌냐? 널 만나게."


친구의 현실 파악 능력이란.


그런데 그런 사람 - 정확히는 그래 보이는 사람 - 이 나타났다. H의 파티에서였다. H는 결혼을 앞두고 거한 파티를 기획했다. 술집을 통째로 빌려 지인과 지인의 지인을 초대해, 공연하고 밤 늦게까지 노는 파티였다.


파티 당일 술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나 초대를 많이 했는지 넓은 공간이 꽉 찼다. 지인들을 동원한 공연이 끝나고, 난 친구들과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H는 사람들을 소개해주며 돌아다녔다.


H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 테이블로 왔다.


“여러분, 같이 앉아서 노세요.”


이들은 H의 고등학교 동창 2명과 대학 친구 1명이었다. 셋 중 H의 고등학교 동창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177 정도에 갸름한 얼굴과 하얀 피부, 그리고 쌍꺼풀 없이 큰 눈이었다. 어,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다. 직업은 회계사였다. 어, 내가 좋아하는 전문직이다.


얘기를 나누며 그의 정보를 입수했다. 서핑을 좋아해서 일년에 두세 번은 해외로 서핑 여행을 가고, 영화를 좋아해서 독립영화를 자주 보러 간다고 했다. 음악 듣는 스펙트럼도 넓었다. 그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전문직, 나의 이상형이었다.


나는 기회를 봐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만 말을 걸었다. 그도 나와 대화하면서 호감의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난 확신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이렇게 수십 마리의 토끼를 잡는 날이 오는 걸까? 나는 견딜 수 없이 설렜다.


밤이 늦어지자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곧 밖으로 나왔다. 회계사 무리는 먼저 돌아갔다. 나는 그가 떠나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왜 나한테 핸드폰 번호를 안 물어봤지? 나랑 그렇게 눈빛 교환했으면서 번호는 왜 안 물어보냐구. 여자친구가 있나? 아닌 것 같던데. 혹시 쑥스러워서? 저 나이에 설마.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기도했다.


‘하느님, 그 사람이 H에게 제 번호를 물어봐서 연락하게 해주세요. 저 그 사람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제발 잘 되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10년 전 송구영신 미사 이후 왕래가 없던 하느님을 간절히 찾았다. 그만큼 그 사람이 절실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는 H에게 내 연락처를 물어봐서 내게 연락을 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하느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난 기도는 했지만 정작 먼저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완벽한 시작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먼저 연락하면 너무 급하거나 밝히는 여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쉬워 보이고, 연애를 한다 해도 을이 될 가능성이 있고, 결혼할 때도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 있고, 나중에 애를 낳으면 독박육아까지 책임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첫 만남에 결혼생활과 출산과 손주까지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의 불리함도 없어야 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매일 밤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3일째, H에게서 카톡이 왔다.


- 류미, 그때 파티에서 만난 회계사랑 연락해?


'주여!'


가슴이 쿵쾅댔다. 신이 응답하셨다. 어떤 식으로 연결되려 그러지?


- 아니. 근데 왜??


- 그때 너랑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대학 친구가 물어보네. 둘이 계속 얘기하길래 서로 연락하는 줄 알았대.


용기를 내보자. 과감하게.


- 흠.. 그래? 나 그 사람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연락처를 안 물어보더라. 말 나온 김에 네가 중간에서 다리 놔줄 수 있어?


맙소사,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쉬하다니! 내키지 않았지만, 가만 있으면 영영 떠나버릴 듯해 체면이고 뭐고 우선 집어치웠다.


- 그래? 내가 한번 알아볼게.


그날 저녁 H는 희소식을 가지고 왔다.


- 류미, 이번주 토요일 저녁에 같이 모여서 술 한잔 하기로 했거든? 그 사람 불렀으니까 너도 나와.


- 그래 좋아. 그날 봐.


어깨춤이 절로 났다. 이렇게 수십 마리 토끼남과 가느다란 인연의 실이 이어지는구나.


토요일 저녁, 성수동 근처 멕시코 음식점으로 갔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저녁에 선약이 있으셨단다.


드디어 그가 출입문으로 들어왔다. 비공식적으로, 아니 다들 말은 안 했을 뿐 공식적으로 우리 둘을 이어주는 자리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난 쑥스러워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H가 어디까지 얘기했을까? 그는 이 자리가 내가 졸라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을까?


술자리는 재밌었지만, 그와는 진전이랄 게 없었다. 오히려 약간 어색했다. 먼저 다가갔다는 자괴감(?) 때문에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그가 말을 시키면 짧게 대답했고, 간절해 보이고 싶지 않아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말과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이윽고 자리가 파하고 나오는데 H가 말했다.


“두 분은 가는 방향이 같으니, 버스 같이 타고 가면 되겠네요. 우리는 2차 가니까 잘가요."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토끼남과 나만 남았다. 밤 12시가 넘어 막차가 끊긴 시간. 우리는 심야버스를 기다렸다.


마지막 기회다.


난 생글생글 웃으며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생글생글 웃으며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외에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하지 않았다. 웃어주면 대충 알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 머릿속에는 '이 사람이 언제 내게 번호를 물어볼까?'하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애초에 내 번호를 물었다면 이런 복잡한 절차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북적대는 심야버스에서 이제 내릴 시간이었다. 그는 아직도 내 번호를 묻지 않았다.


“아… 다 왔네요. 저는 내릴게요.”


주뼛주뼛 하며 내릴 준비를 했다. 근데 번호를 왜 안 물어보니...왜!


“같이 내려요.”


그가 말했다.


“OO동에 살면 2정거장 더 가야 하잖아요?”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약간 튕기듯 물어봤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요.”


그는 나와 같은 정류장에 내렸다. 우리 집까지 걸어서 5분 거리. 나는 옆에서 걷는 그와 즐겁게 대화하는 대신, 그가 언제 번호를 묻을까 조바심치고 있었다. 번호를 물어야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을 테니까. 오늘도 번호를 안 따가면, 사실상 차인 거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우리집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우리집이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번호를 묻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린 게 언젠데 아직도 번호를 묻지 않았다. 이건 무슨 뜻인가. 내게 번호를 묻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가. 열번을 넘게 묻고도 남을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가!


그놈의 전화번호. 이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저는 오른쪽으로 가야 해요. 이제 집에 들어가세요.”

(마지막 기회야. 나한테 번호를 물어봐. 당장.)


“그럼 그쪽으로 같이 걸어가요.”


왜 번호를 안 물어보고 같이 걸어가쟤. 이제 헤어져야 하니까 얼른 번호를 물어보라구.


"아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나 이제 진짜 간다? 제발 번호를 물어봐.)


“그래요? 정말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혹시 집 근처 골목길이 으슥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사실 그랬다. 골목길이 좀 으슥했다. 당시 살던 원룸은 신축 건물이었으나 동네 자체가 깔끔한 지역은 아니었다. 집 근처 풍경을 떠올리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 사람이 우리 집앞까지 왔는데, 으슥하고 원룸만 빽빽히 있는 걸 보고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내 경제력에 실망하면 조금이나마 있던 관심도 사라지지 않을까?


갑자기 초조해졌다. 가난하다고 생각하면 시작도 전에 기회가 날아갈지도 몰라. 절대, 경제력에 대한 환상은 사수해야 했다. 난 재빨리 말했다.


“아니에요! 완전 환하고 가로등도 잘 들어오고 치안도 엄청 좋아요. 진짜로, 진짜로 혼자 갈 수 있어요.”


‘진짜로, 진짜로’라고 말할 땐 두 손을 들어 손사레를 치기까지 했다.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는 뒤돌아서 왼쪽 길로 걸어갔다. 나는 처참한 기분으로 오른쪽 길로 발을 옮겼다.


충격적이었다. 그는 끝까지 내 번호를 묻지 않았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그는 그새 떠나고 없었다. 내가 그렇게 여지를 줬는데 왜, 왜, 왜!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주먹으로 담벼락을 쾅쾅 쳤다. 뭐 저렇게 소심한 인간이 다 있냐? 끝끝내 번호 하나 안 묻는 너는 남자 자격도 없다며 마음속으로 포효했다.


집에 들어와서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부턴 기도하지 않을 테다. 세상이 미웠다. 연애 한번 하기 이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인류가 유지되고 있지?


다음날 아침, H를 포함해 여섯 명이 있는 단톡방에서 이야기가 나왔다.


- 류미, 어제 어떻게 됐어?"


- 아 어제 사실….


여차저차 설명했더니 다들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 야 ㅋㅋㅋ 넌 안 되겠다. 그냥 연애를 포기해. 거기서 남자를 그냥 보내면 어떡해?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건 너한테 관심이 없지 않다는 거고, 번호는 집앞에서 물어봤을 수도 있잖아. 무슨 가난이야 ㅋㅋ 넌 왜 그렇게 망상이 심하냐


그렇구나. 집앞까지 바래다주고 번호를 물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내 세계에 갇혀 다른 가능성은 생각도 못했다. 오로지 번호를 묻느냐 마느냐에만 집착했다. 혼자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안 됐다고 차였다고 실망했다. 어쩌면 기회를 걷어차버린 건 나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상한 철벽녀였다.


- 다시 한번 연락해서 자리 만들어주면... 안 되겠지?


- 어 못해 이제. 넌 그냥 혼자 살아.


다 차려준 밥상을 엎는 망상증 환자에게 두번째 기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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