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도 한 줌이면 꽤 단단하다

편집증 시대의 연애(4)

by 류미

결혼에 코웃음 치던 나는, 실은 결혼이 너무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에게 끌리지도 않으면서도 남편감으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외모는 볼품 없었다. 내 스타일이 아닌 걸 넘어, 인상도 좋지 않고, 피부도 시커멓고, 키도 작았다. 하지만 바이올린과 마케팅을 복수전공하고, 대기업 인사팀에서 근무하여 예술적인 감각과 생계를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춘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내 앞에서 수줍어하는 모습이 왠지 귀엽기도 했다.


이 정도면 남편감으로 딱이지 않나? 바람 피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돈도 많이 버니까. 그래, 결혼에 외모가 뭐가 중요하리, 대화 통하는 게 뭐가 중요하리. 악기 하나 기가 막히게 연주하면서 돈도 잘 버는 사람이니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나 했다.


그런데 막상 사귀기로 하고 보니, 좀 이상했다. 성실하고 긍정적인 줄 알았던 사람이 툭하면 회사가 힘들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동료끼리 사이도 안 좋은 듯했다. 특히 상사를 욕하다가는 눈물까지 비쳤다. 제발.. 회사는 잘 다녀야지. 매번 회사 떄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들으며 경제력에 대해서도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돼 들은 집안 사정은 수위가 거의 네이트판 수준이었다. 짧게 정리하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을 했는데, 새아버지가 폭군이라 틈만 나면 자신과 어머니를 때리고 나중에는 바람까지 나서 집을 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집에 있는 돈까지 싹싹 긁어 가져가고 집 한 채 남은 것도 가져가려고 조폭까지 보내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누나는 집을 나간 지 오래고, 지금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이 나름 좋은 동네에 살고, 바이올린을 전공했다고 해서 집이 좀 사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돈이 없어서 레슨도 제대로 못 받았지만 좋은 학교를 들어간 걸 보면 예술성은 뛰어나긴 했나보다… 라고 생각했지만 예술성은 개뿔.


경제력이 받쳐주면 예술성은 보너스지만, 그게 아니면 예술성은 없는 게 낫다. 그의 섬세한 예술성은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서 상처를 깊이 받는 데 일조했다. 섬세한 감성의 그는 자주 울고 급작스레 분노를 터뜨렸다. 특히 울다가 무언가에 꽂혀 분노할 땐 작은 두 눈이 살기를 띄었다.


안 그래도 불안도가 높은 내 머릿속엔 적색경보가 울렸다.


‘위험하다. 빨리 헤어지자.’


사귄 지 열흘 되는 날부터 헤어질 궁리를 하다가, 딱 2주일이 되는 날 저녁에 만났다. 오늘은 반드시 헤어지자고 말해야지. 분명히 안 떨어지려고 할텐데, 좋게좋게 잘 얘기해야겠다.


서가앤쿡에서 저녁을 먹었다. 먹는 내내 고민이 되어 파스타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안 됐다. 본인 그릇을 싹싹 비우고 배불러서 기분 좋은 얼굴로 앉아 있는 그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미안한데, 아무래도 더 이상 못 만날 것 같아. 내가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좋은 사람인 건 아는데, 내 마음이 그래. 이해 좀 해줘.”


그가 화들짝 놀라더니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작은 두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안 돼.”


안 된다고? 보통은 뭘 잘못했냐고 묻거나 애원하지 않나? 나는 당황해서 같은 말을 횡설수설 반복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작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면 일단 카페로 옮겨서 얘기할까?”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시키고,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내 마음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다고,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그만 만나자고,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이 정도면 알아들을 줄 알았다. 카페에 들어온 게 오후 6시 반이었는데, 9시 반까지 진척이 없었다. 그는 헤어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이혼도 아니고 이렇게 버틸 일인가? 그는 이전에 사귄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하루 종일 설득해서 2년을 더 사귀었다고 말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중간에 도망쳐 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서웠다. 여기서 확실히 단념시키지 않으면 집까지 따라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그의 눈빛에 소름이 끼쳤다. 안전이별이라는 말은 이런 인간과 헤어질 때 쓰는 단어였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그는 단념했다.


"그래, 헤어지자. 대신 내가 먼저 일어날게."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걸어갔다. 그는 나가기 직전 다시 내게로 와서 내 어깨를 꽉 쥐더니 이렇게 말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가 나가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간 척하면서 출입문 밖에 숨어 있으면 어쩌지? 뒤에서 몰래 따라오거나 헤코지 하면 어쩌지? 고작 2주 정도 만난지라, 눈빛이 남달리 무섭긴 했지만 폭력 성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던 중 눈에 뭔가가 띄었다. 납작한 커피 빨대. 뜨거운 커피를 젓는 용도의 납작한 플라스틱 빨대였다. 나는 빨대를 한 움큼 쥐었다. 가느다란 빨대도 한 줌이면 꽤 단단하다. 혹시 그 인간이 숨어 있다가 나를 덮치면 이걸로 기습 공격을 해버려야지. 나는 빨대 한 줌을 생명줄인 양 꽉 쥐고 살며시 문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장되었다. 빨대 뭉치를 든 주먹에 힘을 꽉 줬다. 이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공격하는거 아냐? 골목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잰 걸음으로 조심스레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는 순간, 그가 내 바로 뒤까지 쫓아와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주변을 살피며 사람이 많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나왔다. 길에서 그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빨대를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아직 버릴땐 아니다) 하아… 정말 무서웠다. 버스에 올라 빈 좌석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를 켜고 지친 맘을 달래려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왜 또!!


앞뒤좌우를 살핀 결과 다행히 버스 안에 그는 없었다. 고민하다가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수락 버튼을 눌렀다.


“야 류미, 너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다 진짜. 너 나한테 사죄해야 돼. 난 있잖아, 솔직히 너 정도까지도 필요 없어. 정 미안하면 대신 니 친구 소개시켜줘.”


친구? 누구? 아... 이 놈은 내 중학교 동창 E를 말하고 있었다. 며칠 전 E랑 만나고 있는데 이 놈이 자기 심심하다고 멋대로 나와서는, 내 친구 E에게 묻지도 않은 연애 상담을 해주고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얘는 지금 나 대신 E를 내놓으라는 거다.


‘미친놈아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옌간히 해!'


라고 하면 쓸데없이 자극할 수 있으니, 최대한 상식선에서 달랬다.


“무슨 소리야. 걔 남자친구 있잖아.”


“내가 봤을 땐 걔도 나한테 관심 있어. 그러니까 일단 한번 물어봐.”


싸이코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나도 한계다. 이젠 무섭지도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도 한번 안 돌아 봤다. 만나면 뺨을 때려줘야지. 현관에 도착해 도어락을 열고 작지만 아늑한 내 방 침대에 누웠다. 집에 오는 길이 이렇게나 무섭고 스펙타클할 줄이야.


한 달 후 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하나 왔다. 정말 징글징글하구나. 나는 성실하고 끈기 있는 자세로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내가 너무 부족해서 헤어진 것이고, 너는 대기업 직원에 능력도 있으니 예쁘고 상냥한 여자 만나서 결혼할 거야 파이팅'을 외쳐줬다. 최대한 부드럽게 '부디 잘 살길~'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그렇게 그는 내 앞에서 영영 사라졌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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