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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noNo Apr 04. 2021

첫 학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첫 학기 토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과연 내가 이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한국 대학원에서도 토론식 수업이 있었지만 언어의 문제였는지 수업의 깊이의 문제였는지 내 밑바닥이 단숨에 드러난 기분이었다.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어도 수업 들을 때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잘 알지 못했던 분야의 수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열심히 읽어 온 책이나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의 생각을 언어로 정제해서 전달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 정말 괜찮은 걸까?


모든 수업은 기본이 세 시간 중간에 쉬는 시간은 교수님의 재량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15분의 브레이크를 주셨다. 그 마저 없었다면 뇌에 마비가 왔을 것이다. 리딩 리스트에 있는 논문만 읽어도 잠이 부족해 수면 시간도 충분하지 않은 데다가 말까지 제대로 못하는 날이면 자신감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주 가끔 교수님 질문에 옳은 대답을 하거나 내가 읽은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날은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해야하는 일들이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던 나로서는 굉장한 심리적 보상이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수업 하나하나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에든 일희일비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상하기 때문에..


내가 첫 학기 때 느낀 또 한 가지는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교수님과 친구들은 그걸 가지고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르는 걸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환경에 익숙한 내게 그런 분위기는 낯설지만 힘이 되었다. 한순간에 그런 문화에 익숙해지는 건 아렵지만 몇 년 간 발표를 하고 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차피 완벽한 지식은 없다' (마음의 소리: 인간이 하는 게 뭐 다 거기서 거기지 뭐)는 생각이 한층 더 굳어진다. 진짜 지켜야할 것은 양심과 도덕,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일, 그렇지만 나도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다른 것과는 다르다) 겸손함이라고 생각한다. 틀림을 성장의 발판으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뒤틀린 지식 보다 틀린 지식이지만 발전 가능성이 있는 편이 낫다. 물론 이걸 깨닫기까지 4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어디 수업뿐인가, 먹는 것에 까다롭지 않은 편이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음식은 한정되어있고 매번 나가서 먹자니 맛 없어도 비용이 만만찮았다. 분식집에서 지겹도록 먹는 김밥과 떡볶이가 사무치게 그리운 나날들이 이어졌다(정말 사무쳤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비슷한 시기에 유학온 한인 친구들이 있었다. 외롭지 않게 고향의 맛을 함께 그리워해주는 좋은 친구들. 가끔 유학을 가면 언어를 빨리 배우겠다는 각오로 외국인 친구들만 만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게 꼭 좋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에게도 함께 멘탈을 부여 잡으며 COURSE WORK을 마쳤던 외국인 CO-HORT들이 있었지만 정말 결정적일 때 내가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한국인 친구들이었다. 아무리 외국 생활이 길어져도 나와 같은 문화에서 자란 친구들만큼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 학기는 생활의 적응과 학업의 적응을 동시에 해야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그걸 모르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겠구나 생각하면 정말이지 막막했다. 잠은 부족하고 과제는 넘쳐나고 화장실 변기 물이 넘치고 차는 갑자기 멈추고 내 머리도 작동 정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티가 나지 않게 서서히 그런 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이곳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힘듦을 함부로 판단하고싶진 않지만 만약 척 학기에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들면 아주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다독이며 응원하고 싶다. 일단 느리게라도 구르기 시작하면 더디 가던 각진 시간들의 모서리가 닳아진다. 그리고 점점 더 잘 굴러간다.


* 목숨 연장에 도움이 되는 작은 : 무언가 잘한 일이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에게 상을 주자. 다른 사람의 평가 기준은 잠시 접어두고  스스로 평가자가 되어보는 거다. 가령, 오늘은 수업 시간에 질문을 했어(오예 맨날 듣고만 있었는데!).오늘은 리딩을 하나도   먹었어!! 오늘은 커피    마셨어 등등. 어떤 이유라도 좋다. 뭐든  해낸 나에게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사주든 보고 싶었던 예능 영화 드라마를 보든 그날만큼은 아낌 없이 투자를 하는 거다. 유학 생활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조건들  하나는 자신에게 친절하고 관용을 베푸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마저 나에게 관대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채이고 넘어지기 일쑤다. 내가 적극 나서서 나를 아껴주고 가꿔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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