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요람 May 04. 2022

5. 무의식의 통제-카진스키, 핀천, 테크놀로지

기억되지 못한 나날들 - 전염병 시대를 위한 즉흥곡

 전염병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류문명엔 또 다른 화두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 이번부터 꾸준하게 인류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인터넷 세계의 발달이 바로 그것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핸드폰과 컴퓨터를 통해서 쏟아지는 무수한 미디어 매체들, 그리고 이에 맞춰 변해가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방식등에서 우리는 이 변화를 감지 할 수 있었다. 더불어서 이와 관련된 플랫폼들이 발전하면서 급기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난데 없는 용어까지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일상의 영역 깊은 곳까지 침투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급기야 ‘메타버스’라는 난데 없는 개념이 급부상 하며 개념조차 적립되지 않는 내용은 이렇게도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각종 학술 서적에서 ‘기술’이라 번역되는 말이 있다. 영어로 테크놀로지(Technology)인 이 단어는 한국어로는 조금 더 포괄적인 쓰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기술문명이라 칭하는 현대 사회에 있어 ‘기술’이란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들과 이를 운용하여 만들어낸 또 다른 ‘어떤 것’들을 통칭하는 다소 방대한 용어로 쓰인다.


✳︎


 테러리스트 ‘테오도르 카진스키’의 꿈은 바로 이 기술이 근간이 된, 산업(기술)문명을 무너트리고, 인간 속 자연이 아닌 자연 속 인간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세상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의 파격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우리가 테러리스트에 대하여 가지는 선입견-즉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분노한 루저가 아닌, 무려 IQ167에 이르는 수학 천재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화려한 이력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7살이라는 나이에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25세 나이에 최연소 조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불연듯 71년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몬태나 주의 숲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흔히 그가 현대 문명에 적개심을 드러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몬태나 숲속 작은 오두막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면서 자급자족을 하며 일주일에 한 번 마을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는 일상을 보내던 그는, 자신의 공간으로 밀고 들어오는 무자비한 벌목을 현장을 목격하며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곧 현대 문명을 향한 적개심으로 이어졌고, 카진스키는 기술문명을 향한 자신의 대업을 위해 테러를 감행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카진스키는 테러를 한 이유를 물어 봤을 때, 테러를 저질러야만 사람들은 자신의 글을 주목해서 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언급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각종 테크놀로지업 종사자와 기술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여러 대상들(이를테면 공과대학과 공항 등)을 타겟으로 20년에 걸쳐 수차례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이는 그에게 유나바머(Unabomber_university and airline bomber)라는 별명을 만들어냈고, 그는 마지막 폭탄 테러 협박과 함께 자신이 작성한 선언문을 각 주요 신문 1면에 실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경찰과 언론사들은 끝내-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우 굴욕적이게도-그의 요구를 들어주며 워싱턴포스트 1면에 그의 선언문을 싣게 되었다.


이 선언문이 바로 오늘 날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산업사회와 그 미래’이다. 이 선언문은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면서 기술문명에 지배받은 인간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이 글이 논쟁이 되는 이유는 글의 도발성 때문만은 아닌 이 글을 쓴 사람이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에 더욱 논쟁이 가속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오랜시간이 흐른 현재,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이 선언문은 다시 재평가 받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드라마까지 나올정도로 그의 글과 사건은 아주 여러방면에서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그가 분석한 테크놀로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때는 과대망상 환자의 헛소리로 여겨졌지만-선언문 문장 특유의 교조적인 특징 때문에 이러한 논쟁이 가속화된 측면이 있다-여러 방면에서 토론이 오가고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테크놀로지와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이 헛소리만은 아님을 이제는 확인 할 수가 있게 되었다.


✳︎


 기술의 근본을 논하는데 있어 우린 언제나 ‘기술의 지배’라는 피할 수 없는 논쟁을 마주해왔다. 심지어는 우리가 오락으로 다루는 수많은 SF들에도 언제나 ‘악한 기술력’ 혹은 ‘굉장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악한 존재’가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다룰 수 없는-우리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버린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포심을 내면 깊숙히 가지고 있다.


 카진스키가 던진 질문은 과연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적인 자유가 테크놀로지로 운용되는 산업사회라는 체제와 양립 할 수 있냐는 질문이다. 그는 테크놀로지에 박탈당해가는 인간성의 주체에 관하여 질문한다. 테크놀로지는 어느 정도의 선을 넘으면 인간의 손을 떠날 수밖에 없다.  


 다만 이제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영향은 이전처럼 단순하지 않으며, 더욱 복합적으로 융화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이상 단순한 원리를 이해하면 기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이젠 기계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몸 이상의 복잡성을 띈 기계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해야한다. 그만큼 기계는 인간만큼 복잡한 회로를 가지게 된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도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기계들은 단순한 편의도구 이상의 것이 되었다. 이는 인간의 인지 영역에서도 강한 작용을 하기 시작하면서, 날이 갈수록 빠르게 우리의 생활 영역 곳곳에 침투하게 되었다. 단순한 쓸모에 의해 만들어진 기술력은 이제는 생활 상 전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자유에 관해서 생각 해 볼때, 우리는 흔히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육체 노동으로부터 해방 시켰다는 이야기를 많이 거론하곤 한다. 반면 그로부터의 의존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카진스키는 테크놀로지의 이러한 특성을 경계했고, 이러한 특성들이 가지고 올 무의식적인 존속 상태에 대하여 경고를 남기기도 했다. 즉 단순한 기계에 의한 인간성 파괴에 집중을 한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무의식적-심리적 흐름을 이 선언문에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답으로써의 자발적 ‘종말’을 이야기 한 것이다. 현대 문명을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찾아 잠적했던 남자는 단순히 이 문제가 그곳을 떠난다 해서 끝이 날 사안이 아니며, 언젠가는 자신이 살고 있던 그 거대한 숲 조차도 기계로 뒤덮인 현대 도시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즉 극단적 생태주의적 결말을 염두해두고, 테러리즘이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극단의 것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우린 이 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기계들이 편하다고 느끼며, 상당히 복잡한 기계들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만큼 테크놀로지의 보급은 광범위해졌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은 이 기술력을 공유 할 수가 있게 되었고, 이제 테크놀로지의 운용은 힘있는 소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만큼 기술의 보급력은 일상화되었고, 우리는 그 이전엔 가상의 영역에 그치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반면 이런 것도 생각 해봄직 하다. 테크놀로지가 추구하는 방향성은 더 적은 오차범위의 완벽성이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인간계에 자생하고 있는 또 다른 생태라고 볼 수 있을정도로 복잡한 생명력을-그것을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갖추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개념적으로 볼 때 생태계 처럼 복잡해진 테크놀로지의 세계는 자연계와는 구분되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외계라고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바탕으로 존재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테크놀로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탕으로 존재 할 수가 있다. 우리는 흔히 테크놀로지에 의한 새로운 생태계를 인간의 손으로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 인간은 그저 관리를 할 뿐이며,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무수한 조화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 시키고 있다.


✳︎


 테크놀로지 시대를 맞이해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또 한명의 작가를 만나 볼 수 있다. 바로 토머스 핀천이다. 한때는 <브이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발간 된 작가의 데뷔작 <브이>는 바로 현대 문명의 이러한 무의식적인 흐름을 아주 난삽하게, 그리고 정신없이 그려내는 소설이다. 시도때도 없이 설명도 없이 이상한 행동들이 이어지고 무수하게 많은 인물들이 스쳐서 지나간다. 그림으로 치면 하나의 이야기와 상황을 담고 있는 그림이 아닌, 핵심이 되는 주인공이라는 주체는 가지고 있지만, 브뤼겔의 그림처럼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과 이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지면이라는 매체를 통해 동시 다발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주목할 만한 논평을 하나 만날 수가 있다. 핀천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문명과 인간성의 끝을 소설의 중 후반부 언급하기 시작한다. 과열되어가 가고 있는 문명의 시간은 결국 엔트로피라는 법칙에 의하여 최고 점에서 점점 소멸점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유한한 수명을 가진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그 끝에 남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결국 무생물이며,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무생물들은 인간보다 오랫동안 지상에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핀천은 나아가 인류 문명은 이러한 소실점으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단순히 무생물 만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무생물을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기술문명과 결합된 인간성의 모호함을 다양한 소품들을 통해서 난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를테면 놀랄만큼의 복잡한 문학적 필치로 그려져 있는 2차 세계대전의 말타 섬을 그리는 파우스토 마이스트랄의 서간문 형태의 독백부분이 그렇고, 이야기의 흐름 속에 있는 주인공인 프로페인이 무생물인 마네킹 슈라우트와 함께 함께 대화를 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파우스토 마이스트랄은 폭격으로 인해 인간들이 대피소로 피난한 텅비어있는 파괴된 도시를 홀로 걸으며 남아있는 인간들의 잔해를 보면서 확신한다. 무생물의 완전한 침묵속에서의 평화는 결국 무생물들의 세계가 인간의 어떤 ‘끝’이며 ‘종결’임을 말이다.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완전무결함’은 인간성의 불완전하고 불규칙한 미완결성 보다 무생물들 속에서 보다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재차 마네킹 슈라우트와 프로페인의 대화를 통해서 재확인 된다. 그는 자신이 인간들이 닮고 싶어하는 늙지 않는 아주 긴 수명을 가졌으며, 변수가 없는 완전무결함을 가졌음을 이야기 하면서, 언젠가는 모든 인간들이 그를 닮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프로페인은 반박하지만 그는 요요-엔트로피와 함께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한다-와 같이 늘 하는 일들을 반복하며 무료하게 그의 인생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간과 주어져 있는 조건들 속을 끊임없이 타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는 삶을 말이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어가지만 그의 삶은 이 요요처럼 위 아래로 오가는 수직적인 반복이 인생의 전부인 것이다. 단지 그에게는 이와같은 현대인이라는 역할이 있을 뿐이다.


 핀천은 이렇게 테크놀로지에 의한 생물에서 무생물로써의 반전이라는 이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을 저급한 화장실 유머, 도시전설, 실제 역사적 사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판타지로 버물어진 정체불명의 이야기들을 추리소설의 방법론을 통해 엮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전히 정체불명인 상태로 결말을 맞이하고 그렇게 공중분해되어 사라진다. 그의 소설을 읽고나면 언제나 그렇게 모호함만이 남게 된다. 도대체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그는 <브이>라는 처녀작을 남기고 반세기 후, 21세기에 들어와 그의 나이 70대가 넘어 <블리딩 엣지>를 발표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는 그가 끊임없이 천착해있었던 체제와 인간이라는 논의를, 인터넷과 컴퓨터라는 가공할 만큼 복잡하게 진화한 테크놀로지를 통해 다시 한 번 재조명 하고 있다. <블리딩 엣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소설이지만 나이를 먹은 탓인지 작가가 조금은 친절해진 인상이 있다. 그리고 차이점이 생겨났다면 <브이>와는 다르게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현실 세계에 있는 것들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제 환상이라는 요소가 없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IT 생태는 텍스트라는 객관성을 띈 어떤 매체로 들여다 볼 때, 충분히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들을 살려 70대의 노인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의 방대한 IT지식과 당대 문화적 초상들, 그리고 시대상을 철저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오직 비현실적인 것은 핀천 소설 특유의 황당한 스토리텔링 밖엔 없어보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솜씨에 내가 놀랐던 것은 인터넷이라는 공간과 대중문화라 불리우는 거대한 산업 속에서,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라는 망령이 인간의 무의식 속까지 침투한 황량한 풍경을 매우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소설 주제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후반부 주인공 맥신과 그녀의 아버지 어니와의 대화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는 너무나 복잡해져 그 실체마저 모호해진 ‘인터넷’의 발상과 발명 그자체는 60년도 말의 냉전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국방부 산하의 다르파DARPA(The Defend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국방고등연구기획청)에서 개발한 아르파넷(소설에서는 DARPANET이라고 언급)은 핵교전 이후에도 미국에서의 지휘와 통제 체계를 위해 개발 되었다.  그리고 이 아르파넷은 최초의 패킷 교환 형식의 통신망으로, 현재의 인터넷의 기원과도 같은 발명이 되었다. 그리고 어니는 인터넷의 근본이 냉전으로부터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과거의 텔레비전은 사람들을 세뇌시켰을지 몰라도, 지금은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아무도 인터넷을 통제하지 못하거든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니? 얘, 할 수 있을 떄 그렇게 실컷 믿어. 온라인 낙원이 다 어디서 온 건지 알아? 옛날 냉전 시대에 시작된 거다. 그때의 싱크탱크들은 핵 시나리오를 만드는 천재들로 가득했어. 네모난 서류가방에 뿔테 안경, 하나같이 학식과 양식이 있게 생긴 사람들이 매일 출근해서 세상이 끝장 날 모든 방법들을 상상했지. 너희가 쓰는 인터넷을 그 당시 국방부는 다르파넷이라고 불렀는데, 진정한 목적은 소련과의 핵교전 이후에도 미국의 지휘와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히 해두려는 거였어.”

 “정말요?”

 “그럼. 원래의 취지는 아무리 공격을 받더라도 남은 것들을 연결해서 일종의 네트워크를 언제든 다시 조립할 수 있게, 노드를 넉넉하게 설정해두자는 거야.”

(중략)

 “네가 말하는 인터넷은 그들(냉전시대의 싱크탱크)의 발명품이야. 그들이 만든 마법 같은 편의시설이 이제 우리의 일상의 가장 작은 부분들에 냄새처럼 파고들고 있어. 쇼핑, 집안일, 숙제, 세금에까지 파고들어, 우리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귀중한 시간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순수함 같은 것은 없어. 어디에도. 결코 없었어. 그것은 죄로써 태어났어. 그것도 가장 최악의 죄로. 계속 자라면서, 그것은 지구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모질고 차가운 충동을 가슴속에 품는 것을 절대 그만둔 적이 없어. 변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 얘야.”

(중략)

 “하지만 역사는 계속 흐르잖아요, 아빠가 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하던 대로요. 냉전은 끝났어요, 네? 인터넷은 계속 진화하고 있어요. 이제 그것은 대화방, 월드와이드웹, 온라인 쇼핑으로 바뀌고 있고, 최악의 경우라고 해야 약간 상업화되고 있는 정도일 거예요. 이 수십억 사람들에게 얼마나 희망과 자유를 주고 있는지 보세요.”

 “자유라고 하지만, 그건 통제에 근거한 거야.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누구든 다시는 사라지지 못해. 그다음 단계로, 휴대폰과 연결을 하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완벽한 감시망이 구축돼. [데일리 뉴스]의 만화 기억나? 딕 트레이시의 손목 라디오? 이제 없는 데가 없을걸. 멍청이들이 하나씩 착용하겠다고 사정할 테니까, 미래의 수갑을. 끝내줘. 미국 궁방부에서 꿈꾸고 있는 건 전세계의 계엄령이야.”

“이렇게해서 편집증이 생긴다니까.”

<블리딩엣지> 609p~610 중 박인찬 옮김 / 민음사


어니는 그가 일했던 냉전 시대 국방부의 모습과 현대 과도한 자본주의의 미국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찌 보면 꼰대같은 과도한 편집증으로 현대 사회를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일정부분 우리가 느끼는 현대 사회의 피로감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도저히 이 무수한 침략을 막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광고를 선택해 볼 권리는 없으며, 인생 자체가 거대한 쇼핑몰이자 쇼윈도우가 된 듯한 착각을 받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이것을 편집증이라고 우리는 단언 할 수 있을까?


✳︎


 사실 기술에 통제된 자유라는 문제는 산업혁명 이후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주제였다. 하이데거-블랙노트북의 발견으로 이름을 거론하는것 조차 위험해진-의 <강연과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문은 단연 ‘기술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린 많은 부분 카진스키, 즉 유나바머가 이야기 했던 이야기들과 겹치는 몇가지 부분들을 확인이 가능하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온몸을 자연에 맡기며 자연의 결과를 따라가거나, 단순히 필요한 결과물을 필요한 만큼 자연으로부터 가공하던 과거의 수공업적인 기술과는 다르게, 현대의 기술은 결과물을 위해 자연이 존재하는, 즉 자연을 ‘닦달(번역가 이기상씨는 이 단어로 번역했다)’해 결과물을 착취해 뽑아내며, 기술이 인간에게 주문을 내린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현대의 기술은 그렇게 그 결과물들을 필요이상으로 축적시켜 나간다. 그리고 이 결과물들의 총합은 인간의 필요성 이상으로 과도하게 쌓여 있다. 과거엔 자연이 먼저 존재하기에 이곳에서 살아갈 기술이 인간에겐 필요했었고, 인간은 이 기술들을 자기 손아래 놓고 지배해 왔지만, 현대에 와서 기술이 자체적으로 진화해감에 따라 자연은 기술을 위한 준비물에 불과하게 되었고, 이제 인간은 이 거대화된 기술의 부름을 받는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케빈 켈리라는 작가는 <기술의 충격>에서 유나바머가 기술에 대하여 지적한 위험성들이 충분히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테크놀로지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의 삶이 현대 기술과 함께 갈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그 이상의 대안이 없는 이상 우리는 우리의 삶과 함께 진화해온 '기술'을 떼어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 문명의 지적, 기술적(이 단어를 켈리는 소소한 발명품 부터 문학적 장작물에 이르는 인간 삶의 모든 기술적 측면을 다루며 더욱 방대한 용어로 확장시키고 있다.) 모든 분야를 '테크늄'이라는 단어로서 정리한다. 그러면서 켈리는 테크늄은 이제 거의 새로운 생물계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테크늄은 커질 수록 우리의 삶에 위협되는 요소들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차가 사람을 죽였다고 차를 모두 없앨수는 없는 노릇”이라면서, 문명에 축적되어가고 있는 기술이라는 가능성이 인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요소들에 주목 하면서, 테크늄을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쪽으로 조율해 함께 나아 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테크늄은 전혀 다른 ‘생명체’에 가까워 졌기에 인간은 이것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결국 완전한 자유와 통제된 편안함 사이의 갈등은 늘 있을 수 밖에 없고, 인간 개인의 본성과 사회적 본성 사이에는 절충 되기 힘든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삶 깊숙히 자리한 현재, 우리가 자유와 통제의 영역을 구분하기엔 너무나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본질이라 부르는 것들 속에는 물론 하이데거나 카진스키가 거론했던 것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들이 거론했던 기술의 형태보다는 수십배로 복잡해진 것이 현대 사회의 기술들이며, 이제 테크놀로지의 방향성과 모습을 이야기하자면 그들이 이야기 했던 본질에 수십수백배의 모호함이 추가된다.


 이처럼 우리는 테크놀로지라는 영역의 무한한 전망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시초엔 발견과 발명이 있었겠지만 지금에와서 점점 복잡하게 변해가는 기술의 양상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아득히 떠나 갔기에 말이다. 다만 우리가 이 징조들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는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기술이 발전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이성이나 윤리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될지 모른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감이 아닌 우리에게 현재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확실한 ‘징조’이다. 전문성과 아마추어의 영역은 점점 흐려지고 있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구분짓던 잣대들은 적어도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전환이 가능하다. 설사 그것이 현실에 기반이 없는 절대적인 이미지에 기반한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며 우리가 다룰 수가 없는 현상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변수를 쉽게 컨트롤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가상의 변수는 현실 세계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보르헤스의 단편들 처럼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역전이라는 극단적으로 포스트모던한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장점과 단점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 큰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인정해야 한다. 현대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양 극단이 동시에 충돌하고 있는 기묘한 세계이다.


 기술이 인류의 생활과 공간을 크게 바꿔놓았다면 인터넷은 인간의 인지와 생활 문화 전반을 뒤바꿔 놓았다. 작은 스크린으로 끊임없이 미디어의 폭격이 이어지고 극도로 고도화된 소비사회는 이제 인간의 인생 그 자체의 일부가 되었다. 더 이상 산업은 인간의 인생에서 분리되어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이것의 좋고 나쁨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핀천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무생물로 나아가는 기술의 방향성과 생물로 남아 있는 인간의 방향성 사이의 대립 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조금은 숨을 쉴 틈을 마련 할 필요성은 있다. 우리는 아직은 결코 가상이 현실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온다면 영원히 못느낄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지역 문화예술의 고유한 비평 문화를 꿈꾸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