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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26년 전 그날의 기억

반대하시던 친정아버지께서 둘의 만남을 허락하신 뒤로 두 분 어머니들께서 만나 결혼을 후딱 결정을 하셨지요.

급히 급히 결혼식 날이 잡히고 급히 급히 결혼식 장소가 결정되고 여차 저차 정신없이 한 계절이 지나 대망의 결혼식 날이 되었습니다.


장거리 연애라 이젠 저녁에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이 난 데다가 오랫동안 얼굴도 못 봤던 친구들이 내 결혼식이라고 한 자리에 모이니 나도 얼른 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버리고 눈 끝을 콕 콕 찌르는 송충이 같은 속눈썹도 떼 버리고 쟤들하고 놀고 싶은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대기실 신부는 참 조심하지 못했었답니다.

결혼식 사회를 처음 보는 신랑 베프의 실수로 결혼식 중간중간 순서가  건너뛰어지고 주례사 짧기로 유명하신 교수님의 5분 주례사 덕에 초스피드로 끝난 결혼식.


사진 찍고 폐백 드리고 피로연 인사드리고, 신혼여행 비행기 시간을 빠듯하게 잡아 둔터라 바삐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지요.


차가 출발하고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노란 은행잎이 가득한 길 끝에 내 아버지가 서 계셨습니다.

딸내미가 탄 차가 멀어지는 내내 아빠는 그 자리에 서 계셨어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난 이제 아빠 엄마가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구나.

이제는 아빠 엄마와 헤어져 내 집으로 돌아가겠구나….


제주도에서의 첫날밤.

신랑이 헤어스프레이로 떡진 내 머리에 꽂힌 핀을 백개도 넘게 뽑는 동안에 철부지 신부는 아빠 엄마 생각에 펑펑 울었다지요.


티브이에선 며칠 전에 돌아가신 노 태우 대통령이 구속되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어요.


1995년 10월 29일.

저는 그렇게 결혼을 했고 제 아버지는 그날 그렇게 노란 은행나무 아래 오래도록 서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분이 껴안고 트럭 뒤에서 한참을 우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작은 고모가 혀를 차며 나중에 말씀을 해주셨답니다.

아버지나 큰 아버지나 두 분 다 딸들에겐 너무 애틋하신 분이셨거든요.


아버지와 엄마를 떠나 독립(?) 한지 이제 딱 26년이 됐습니다.

그 긴 시간 하나도 자라지 못한 딸을 엄마 아빠는 아직도 많이 걱정을 해주시고 아직도 어린 딸처럼 예뻐해 주시네요.


한국은 지금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테지요.

26년이 지난 지금도 노란 은행잎을 보면 그날의 아버지가 떠오른답니다.


성당엘 다녀오니 큰 아들이 이렇게 꽃다발을 안겨 주네요.

엄마가 맨날 살찐다 걱정하니 케이크 대신 엄마를 위해 꼬리곰탕을 투고해 왔답니다.

금사빠 상남자의 새 여자 친구가 사준 거라며.


여자 친구와 둘이서 밥 먹는 엄마를 앉아 보고 있을 기세라(이분들은 식사를 마치고 왔다셔서 )  “leave me alone,please” 라고 쫓아 방으로 보내고 이렇게 혼자만의 상을 차렸습니다.

한국에 있는 남편과 긴 통화를 하며 밥을 먹었어요.


내년 결혼기념일에는 아마도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엄마 아버지를 모시고 같이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네요.


은행잎은 아니지만 노랗게 단풍 든 살구나무 잎이 마당에 떨어져 있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더 나는 게 이따 밤에 전화를 드려 봐야겠어요.


꼬리곰탕을 먹으면서는 작은 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어서.


결혼하고 ‘사반세기’가 넘어 버렸습니다.

나이가 제법 들었는데도 전 결혼하던 그날의 그 철부지 신부처럼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철딱서니가 없는 남편과 결혼 전처럼 장거리 연애 중입니다.

달라진 거라면 그때보다 더 먼 거리에서 서로 살고 있는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때보다 둘 다 훨씬 늙어(?) 버렸고요.

아…. 아들도 둘이군요.


뜬금없지만 노 태우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의 과오와는 상관없이 우리 결혼사와 그분의 흑역사가 겹치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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