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할머니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미정'이다. 아름다울 美, 맑거나 밝을 晶. 성은 鮮于. 그 이름으로 26년을 살다가 독일로 유학 가서는 미융Mi-Jung으로 불렸다. 독일애들은 알파벳 J의 발음을 [jɔt]요트(에 가까움)라고 하니, 미정이 미융이 된 것이다. 그 웃기는 미융으로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초반까지 보내고, 삼십 대 후반부터는 메건이 되어 캐나다에서 3년을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미정으로 부르라고 해도 되는 걸, 왜 굳이 생일에 태어난 해의 상징에 뭐 이런 거를 따져가며, 왜 굳이 M을 넣어서 메건으로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흠, 철이 없었지 뭐. 별로 예쁜 이름도 아니구먼.
그러다가 충청남도 병천에 살면서 성공회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기장에서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그랬는데, 시골에서는 기장교회를 찾기 힘들었고, 중학교랑 대학 때 접했던 (그래서 익숙하고 좋은) 가톨릭의 그릇에 개신교의 맛을 더한 성공회가 나에겐 좀 멋져 보였다(실은 머리에 쓰는 미사보랑 묵주랑 영세 시 받는 신명이라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교리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게 되었다. 지도해주던 신부님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이름을 쭉 보여주셨는데, 여성의 이름은 하나같이 이상했다. 성인 이름 고르는 건데 뭐 꼭 여성은 꼭 여성을 골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 신부님을 조르고 설득하여 내가 갖고/되고/따르고 싶은 성인을 골랐으니, 그가 바로 '제롬' 성인이다. 히에로니무스 혹은 예로니모라고도 부른다.
제롬(Jerome)은 고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당시 나는 독일어와 영어 번역을 하며 번역밥을 먹던 터라 은근 자부심도 있었다. 후후. 나의 성인이시여, 저도 번역을 한답니다, 이러면서. 제롬 사제의 상징물은 십자가·해골·모래시계·책·두루마리라고 하며, 흔히 학자·학생·고고학자·서적상·순례자·사서·번역가의 수호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보라, 나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말이다. 머리는 나빠도 뭐든 배우는 거 좋아하지, 책 좋아하지, 도서관 좋아하지, 번역도 좀 하지...게다가 책을 만들며 살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반전. 영세명만 받으면 뭐하나. 정신이 좀 들어서는 (뭣도 모르는 주제에, 원래 선무당이 사람 잡으니까) "성공회밭다리걸기"란 요상한 글이나 쓰고, 그러고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몸을 빼더니만 급기야 '코로나'라는 대사건을 기화로 두문불출 온라인 예배 어쩌고 하며 집에만 있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흠, 헤븐이 어디여? 죽으면 먼지가 되어 우주로 가는 것" "아들아, 너는 정녕 살아계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냐?"(우리 아들은 신심이 훌륭하다) 따위의 막말을 던지며 (저쪽 분들이 보기에) 길 잃은 늙은 염소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몸이 아픈 어머니, 연로하신 아버지가 식사 때마다 기도를 드리면, 그걸 보면, 괜히 낯설다.
흠, 나도 언젠가 다시 기도할 수 있으려나? 미정, 미융, 제롬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