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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Feb 27. 2020

번역서 제목의 좋은 예  

스테퍼니 스탈, 『빨래하는 페미니즘』(2014, 민음사)

제목 때문에 집어 들었다. 얼마 전 '주부 생활로 얻은 빨래 강박, 어딜 가나 생각나는 빨래를 잊고 싶다'는 글을 썼던 차에 『빨래하는 페미니즘』이란 제목을 본 거다. 페미니즘은 낯설지만 빨래와 엮인 내용이라면 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표지의 빨랫줄엔 남자, 여자, 아이 속옷이 나란히 걸려 있다. 원제가 『Reading Women: How the Great Books of Feminism Changed My Life』이니 한국어판 제목은 출판사에서 새로 붙인 모양이다. 이 책은 결혼과 출산 후 모교를 다시 찾아 페미니즘 고전 수업을 청강한 한 여성의 '매우 개인적인 소회(p.422)'이자 '반드시 읽어야 할 100대 페미니즘 논픽션' 중 한 권이다.

일하는 부모님 아래 독립적으로 자란 스테퍼니 스탈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다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한다. 사랑하는 애인과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그녀의 삶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간다. 대학 시절 페미니즘 고전인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읽을 때만 해도 그녀는 거기 등장하는 구닥다리 여성들은 자신과 다른 세상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딸아이를 돌보며 『여성의 신비』를 다시 읽었을 때 깨닫는다. 밥 차려주고 집 치우느라 '나는 누구'인지 잊어버린 구닥다리 여성들과 자신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곧 그녀는 짐을 꾸려 모교인 바너드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2년간 페미니즘 수업을 듣는다. 나이 든 청강생 자격으로 참여한 수업은 젊은 날 들었던 페미니즘 강의와 달랐다. 수업에서 다룬 26개의 페미니즘 고전을 자신의 삶과 함께 정리해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썼다.

지난달 나는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를 읽다 말았다. 미국에서 일어난 최근의 여성 혐오 범죄와 강간 사건이 등장하는데 레베카 솔닛의 강한 어조 영향인지 마치 활자마다 뾰족한 창이 꽂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됐구나 했다. 작년에는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읽다 말았다. 지금의 미국 교육이 잘못된 페미니즘 정책 때문에 남자아이를 배제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고 주장하는 책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저자가 비판하는 '캐럴 길리건'의 연구가 어떤 내용인지 몰랐기 때문에 논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왜곡한 창세기 이브의 이미지로 시작해 1세대 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버지니아 울프, 자유주의와 급진주의로 나뉜 2세대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조주의를 도입한 3세대 페미니즘을 소개한다. 강간과 캐럴 길리건의 『다른 목소리로』 도 다룬다. 저자는 대학 수업을 들으며 읽은 페미니즘 고전을 '일반 독자' 시각에서 솔직하면서도 깊이 있게 풀어냈다. 페미니즘이 가정과 육아라는 가치와 상충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크게 들렸다. "페미니즘의 의도가 여자들의 경험이라는 옷감을 짜는 것이라면, 인생의 가장 다채로운 실이랄 수 있는 사랑과 낭만과 육아의 기쁨을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p.394) 여느 전문가의 책보다도 '나의 첫 페미니즘 책'으로 알맞아서 한달음에 읽어 내었다.


"역사는 각 세대에게 고유한 무늬의 입맞춤과 타박상의 흔적을 남기지만 여자들이 겪는 근본적 문제는 세대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시간과 공간의 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자는 자기 정체성의 경계를 타협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 분모가 있다. (...) 페미니즘 고전은 우리 자신의 삶을 다른 여성들의 삶과 비교하고 대조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예측 가능하고 관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준다."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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