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 프로필에 내 소개를 쓰고 싶어 편집 버튼을 눌렀다. '잠, 책, 글쓰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한 줄 쓰고 직업을 선택하려 했다. 그런데 오십 여개 직업 중 ‘주부’는 없었다. 조금 섭섭했지만 주부만 없는 건 아니었다. '기타'도 없었다. 브런치 플랫폼을 만든 분들은 왜 브런치 이용자의 직업을 그 오십 여개로 한정했을까. 잠재 필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직종들인가. '작가 지망생'과 '에세이스트' 중 무얼 고를까 하다 ‘학생’을 선택했다.
나는 학생이다. 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 4학년. 마흔이 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2016년 방송대에 원서를 넣었다. 졸업하면 유치원 2급 정교사 자격증이 나오고 아이 키운 경력(?)을 살려 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정작 유치원에 가 보면 선생님들은 다 긴 생머리 젊은 여성들인 걸 알면서도 입학을 하고 싶어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만든 셈이었다. 학생증이 나왔고 지인들에게 보여주었다. "나 다시 학생 됐어요."
별 자랑거리도 아닌 학생증을 내보인 이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학생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아이들 키우며 가까이 지냈던 이들에게 "중간고사 시즌에는 제가 잠적할 수도 있어요."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대학 때부터 이 과목 저 과목 기웃기웃, 호기심은 많았지만 지구력은 없었던 나는 끝까지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는 꾸준한 4년을 보내 졸업장을 받고 싶어서 일부러 입학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재미있는 건 뒤이어 마주치는 이웃들의 격려였다. "oo엄마한테 들었는데 요즘 공부한다며. 영문학 재밌어요?"라고 묻기도 하고 "대학원 갔다며, 정말 대단해요." 라 하기도 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방송대고요, 유아교육과예요."라고 정정하다 나중에는 그냥 "네, 고마워요." 해 버렸다. 어차피 우린 남의 일을 잘 모른다. 나도 다른 집 아이 이름과 나이를 매번 듣지만 곧 잊어버리잖은가. 영문학이든 유아교육이든 뭣이 중한가, 중단 않고 마치면 되지. 학생이라 말하고 다닌 덕분이었을까. 나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있다.
지난해 겨울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카페나 도서관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처음에는 "연락도 없이 뭐 해? 브런치가 뭐야?" 묻던 지인들도 이제 내가 혼자 나와 있다고 하면 "글 써? 힘 내." 한다. 친구들은 영감을 주겠다며 김영하 소설가의 <자기 해방의 글쓰기> 같은 유튜브 영상을 보낸다. 책 읽고 글 쓰는 게 시간을 들이는 일이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이번 겨울에 노들섬 브런치 작가 집필실을 이용하게 됐어. 너희는 밥 잘 먹고 할 일 하고 있어." 지난 몇 년은 학생이라 소문내고 다녔는데 이번에는 본의 아니게 글 쓴다 말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랬더니 요즘 듣는 소리는 "책 쓴다며? 책 언제 나와?"다. 책이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물건이었던가. 집필의 고단함은 산고에 비견될 정도 아니었나. 붉어진 얼굴로 나는 "원고도 없는데 무슨 책이 나오냐"고 웃곤 한다. 오해는 내 글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올 초 나는 브런치에 <처음 쓴 출간 기획서>라는 글을 올렸다. 5편 정도로 정리해 올리려 했는데 도중에 쓰다 말았다. 출간 제안을 받았다는 내용까지만 쓰고 기획서가 거절된 이야기를 쓰지 않았더니 친구들이 제안받은 것 어찌 되었냐고 묻는다. 오늘 아침에는 내 글에 M**** 님께서 "책 출간 작업 중이라고 본 것 같은데, 멋진 작품 기다라고 있겠습니다!"라는 댓글을 주셨다. 송구스러웠다. 그건 오해일 뿐 난 책은커녕 원고도 없는 작가 지망생일 뿐인데. 그리고 반성했다. 오해 살 만한 글을 써 놓고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은 것을.
앞으로도 지인들은 물을 것이다. 글 잘 쓰고 있냐고, 책 언제 나오냐고. 그건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왜 쓰지?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까? 언젠가 글이 모이면 나는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낼 것이다. 답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독립출판과 부크크 출판도 생각하고 있다. 지난 한 두 달 사이 독립출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독립서점의 글 쓰기 수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주제와 목적이 분명한 짜임새 있는 글을 써서 어떤 형태로든 묶어 내고 싶다. 학생이라 말하고 다녔기에 학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 글 쓴다고, 책 내고 싶다고 계속 떠들고 다니련다. 말이 씨가 되어 내 책을 손에 쥘 날이 오기를. 아, 프로필의 '학생'은 '에세이스트'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