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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Apr 01. 2020

플렉스

나에게 여윳돈이 생긴다면

'플렉스(flex)'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성공이나 부를 뽐내거나 과시한다는 뜻이라 한다. 아들에게 "너 플렉스 알아?" 물었더니 "당연하죠" 한다. 신조어 만큼은 엄마보다 잘 안다는 건가. 원래는 래퍼들의 말이었고, 사람들이 명품을 구입한 후 SNS에 자랑할 때 '플렉스 인증'이라고 쓰는데, 초등학생들도 새로 산 학용품을 보여주며 '오늘의 플렉스'라고 한단다. 지름신 같은 옛날 말보다 훨씬 세련되고 허세와 냉소도 더해진 느낌.


케이트 쇼팽의 단편 소설 「실크 스타킹」이 생각났다. 살림에 쪼들려 지내던 소머스 부인에게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여윳돈이 생긴다. 부인은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 아이들의 새 옷과 모자를 사려고 상점으로 간다. 할인 상품 중 쓸만한 걸 건지려고 고군분투하던 그녀의 손에 우연히 닿은 고급 실크 스타킹. 고혹적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자태에 홀린 듯 돈을 지불한 그녀는 낡은 면 스타킹을 벗고 실크 스타킹으로 갈아 신는다. 그 다음은? 플렉스. 부인은 충동에 자신을 맡긴 채 미끈한 구두와 가죽 장갑, 잡지를 사더니 코스요리를 먹고 마티네 공연을 보러 간다. 연극이 끝나 관객들이 흩어지면서 플렉스도 끝이 나고, 그녀는 집으로 가는 전차를 탄다.  


소머스 부인 수중에 생긴 돈은 15달러였다. 1896년 발표된 소설이니 15달러면 지금 가치로 얼마 정도일지 모르겠다. 이것저것 사고 먹고 즐긴 코스를 생각해 보면 몇십만 원 정도 될 것 같다. 여행지에서라면 모를까, 난 서울 하늘 아래 혼자 다니며 하루에 그만한 돈을 쓸 용기가 없다. 지금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사람이다. 이삼일에 한 번 식자재를 사고, 외식비에 학원비, 철철이 커가는 아이 사이즈 맞춰 옷도 사야 한다. 돈 쓰는 일도 피곤하고 부담스럽다.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아서 나에게 소비란 할인과 2+1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은 오래전 소머스 부인처럼 돈을 들고 나선 적이 있다. 생일에 시댁에서 챙겨주신 금일봉을 서랍 깊숙이 모셔 두었다가 계절이 바뀌던 어느 날 봉투째 들고 평소 갈 일 없던 백화점에 갔다. 그녀와 달리 나는 처음부터 별렀다. 반드시 나를 위한 물건을 사리라. 꼭대기 10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내려오며 무얼 살까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건 비싸거나, 한번 더 생각하면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점포 사이를 빙빙 돌았더니 힘이 들었다. 지하 1층에 올 때까지 아무 것도 고르지 못하다 프라이팬을 사 왔다. 무슨 이탈리아 브랜드 프라이팬이었다.


19세기 말 소머스 부인의 플렉스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실행하기 쉽지 않은 판타지다. 럭셔리한 하루를 즐기려면 돈, 시간, 결심, 체력 네 가지가 갖춰져야 한다. 나도 화끈한 플렉스를 원하지만 소중히 손빨래해야 하는 실크 스타킹은 내 취향이 아니고 구두와 가죽 장갑도 필요 없다. 혼밥은 잘 먹지만 혼자 보는 공연은 어색할 것 같다. 만약 나에게 얼마쯤의 시간과 돈이 생긴다면, 나는 서점에 가겠다.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신간 다 주세요." 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테니 혼자 책을 고르겠다. 말없이 찬찬히, 책 가격 안 보고, 사놓고 안 읽으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 없이, 집었다 내려놨다 하지 않고 과감하게. 베스트셀러와 신간을 섞고 좋아하는 작가의 리커버 에디션과 하드커버 고전을 카트에 담겠다. 중고서점에 되팔지 못하게 색이 예쁜 스테들러 형광펜으로 죽죽 밑줄을 긋고 쓱쓱 메모해 가며 읽겠다. 애서가에게 궁극의 플렉스는 서재이거나, 눈을 더 높인다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책 빌딩을 소유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 플렉스는 이 정도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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