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2023)
영화 서울의 봄은 12.12사태를 배경으로 한다. 전두환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이 일으킨 군사반란의 과정을 그린다. 영화의 저변에 ‘힘’이라는 단어가 떠다녔다. 어떤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인가? 권력 있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힘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힘은 마음에 새긴 뜻에서 온다. 강력한 뜻이 자신과 타인을 움직이게 한다. 영화에 수많은 고위직 인물들이 나왔으나, 가장 힘 있는 자는 두 명이었다. 전두광과 이태신. 그러나 그들의 힘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 전두광은 약육강식의 세계관에 사는 자로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불 끊는 탐욕에 사로잡혔다. 전두광에 맞서는 이태신은 안일한 불의보다 험란한 정의를 선택하고자 하는 강한 신념을 지녔다.
그 둘이 같은 대사를 할 때, 힘의 성격은 더욱 대조된다. 부하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할 때, 둘 다 자신을 총으로 쏘라고 했다. 전두광은 상대가 자발적으로 선택할 배짱이 없음을 확실히 직면시키면서 동시에 정서에 호소하여 상대를 조종했다. 반면 이태신은 자신을 쏘는 게 소신을 따르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각자 가지고 있는 힘의 논리대로 반응한 것이다. 전두광에게 상대는 약하고 제압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면 이태신에게 상대 또한 소신을 따르는 독립된 인간이었다.
공자는 말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하고는 대화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 부끄러움을 알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전두광을 이태신은 단번에 간파했다.
전두광: 이보시오 수경사령관. 당신 혼자 고집부려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겁니까? 그라지 마시고 이쪽으로 잠깐 넘어오세요. 넘어오시면 제가 차분하게 잘 설명하겠습니다.
이태신: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이태신이 마지막에 전두광에게 하는 대사가 전두광의 본질을 꿰뚫는다.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이제 눈을 돌려 강력한 힘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을 살펴보자. 전두광과 이태신의 지위 이상에 있음에도 12.12사태에서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더 큰 힘에 설득되거나 자신을 위탁한다.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자신의 안위가 보존될지에만 전정 긍긍한다.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잃은 사람들,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부담이고 두려움이다. 학연과 지연이라는 익숙한 집단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좋은 안식처가 된다. 성찰적 자아를 버리고 다수에 속함으로써 책임의 무게에 벗어나 안전을 얻는다. 영화를 보면서는 엄격하게 단죄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전두광이 노태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명령 내리기를 좋아하는 거 같지?
인간이라는 동물은 안 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 주기를 바란다니까.”
교실에서 학교 폭력의 키는 소수의 주동자가 아닌, 다수의 방관자가 가지고 있다. 똑같이 12.12사태가 가능했던 것은 전두광이의 눈먼 질주에 동참했던 다수들 때문이었다. 다수의 의식 수준이 바뀌지 않으니, 한 명의 독재자가 죽었다고 나라가 바뀌진 않는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찰나처럼 지나갔다.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 의식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파시즘의 심리학적 기원을 밝힌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자유로부터 도피해 복종하거나 의존하지 않으려면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고. 적극적 자유란 인간이 스스로 모든 일에 주인공이 됨으로써, 정서적이고 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과 관계를 맺는 일을 말한다.
외부의 권위에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내맡기지 말고, 깨어서 스스로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고 선택해야 한다. 독립된 자가 되는 고독과 불안을 회피한 대가는 동물을 왕으로 모시는 결과임을 잊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