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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일 없이 달리기 Sep 24. 2023

내가 달릴 수 있는 행복의 크기

추구의 플롯 그리고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

*[별일 없이 달리기 magazine]

평안한 달리기를 추구하며 ‘달리기와 일상’에 대한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는 '추구의 플롯'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추구의 플롯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떤 유무형의 물질을 좇고 깨달음을 얻는 성장 스토리의 포맷이다. 이런 추구의 플롯에는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는 있는데 외면적 목표는 주인공의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그 어떤 대상을 뜻하고, 내면적 목표는 주인공이 의식한 목표는 아니지만 추구의 플롯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을 뜻한다. 이런 추구의 플롯의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를 간단한 줄거리로 풀어서 설명해 볼 수 있다.


 "주인공 호이는 보석을 찾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다. 호이는 이 보석을 찾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고 여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같이 성장하기도 하였다. 수년간의 여행과 탐험 끝내 보석이 담긴 상자를 찾아낸 호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작은 거울 하나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보석은 주인공의 외면적 목표, 여정의 종착역에서 얻은 교훈은 내면적 목표인 것이다. 대부분의 러너는 다이어트라는 외면적 목표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달리기를 주제로 블로그도 자그맣게 운영하고 있는데, 셀제로도 달리기와 다이어트를 주제로 한 포스팅이 유입률이 높다. 달리기는 체중감량을 위한 좋은 수단이 맞긴 하지만, 42.195km를 달리는 탄탄한 몸을 가진 주자들에게 다이어트가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까? 그들에겐 이미 달성한 성취라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달리기가 주는 외면적 목표 이상의 내면적 목표가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달리기에 대한 내공이 깊을수록 외면적 목표의 크기만큼 내면적 목표의 크기도 비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경우도 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체중감량이라는 외면적 목표 때문이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기간과 그 이후 2년 정도를 제외하고 항상 과체중으로 살고 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식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수년간의 건강검진 결과지는 ‘객관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어 왔지만, 바보 같은 나는 당장 눈앞에 있는 위험이 아니고서야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보건사가 찾아왔다. 대사증후군 위험자들을 대상으로 짧은 면담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30대 초반에 보건사 면담이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뭐든지 쉽게 훌훌 털어버리는 성격이니 대수롭지 않게 면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상담의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내년엔 혈압약이나 당뇨약을 드셔야 될 것 같은데요?" 그간 내게 위험신호를 보냈던 종이쪼가리보다는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훨씬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2022년 01월, 건강이라는 외면적 목표와 함께 나의 달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달리기를 꾸준히 지속할 수 있게 도와 것은 내면적 목표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의 속초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최근 1~2년 사이에 속초에 꽤나 자주 다녀왔다.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 아닌데도 속초에 1년 사이 두세 번을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상당히 의미 있다. 이 무렵 나는 달리기에 어느 정도 미쳐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오나 어떻게든 매일 달렸으니 말이다. 그 열정은 속초에서도 이어졌다. 속초는 달려서 여행하기 딱 적당한 크기다. 그 이유는 크기에 있다. 전체 면적이 105.2 km² 다.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의 1/10, 서울의 1/6 수준밖에 되지 않으니 넓은 시(市)는 아니다. 이 마저도 설악산이 차지하는 영역과 주거지역을 제외하면 관광지라고 부를 수 있는 면적은 17 km²정도로 꽤나 아기자기한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여의도의 2배 정도)

 

 그래서 확실히 속초는 자력(自力)으로 이동하기 좋은 곳이다. 속초의 나는 *청초호부터 영랑해변까지 걷거나 달리기를 즐긴다. 청초호에서 갯배나루터까지는 속초의 '시내'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속초라는 동네를 어느 정도 즐기기 좋다. 갯배나, 전통관광시장 전통시장까지 이어지는 길은 지역색 꽤나 느껴지기 때문에 뛰는 동안 볼거리가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달린다. 그러고서 동명항에 다다를 때즈음에는 내가 속초에 왔구나라는 걸 실감 나게 해 준다. 항 너머로 보이는 바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봄/가을에 동명항부지에서 열리는 오징어/양미리 난전이 나에게는 '속초'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영금정에 다다랐을 때서야 동해의 광활함에 벅차오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곳에서 영랑해변까지 가는 길에 이어지는 '포장마차'와 '카페'거리는 밤과 낮(아침)의 분위기가 서로 대조되니 꼭 낮과 밤 두 시간대 모두 걸어보길 추천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루트가 청초호부터 시작해 영랑해변까지의 속초 달리기 코스 중 하나이다. 


 이 무렵 나는 달리기가 나에게 해방감을 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나의 힘으로 이곳저곳을 지루하지 않은 속도로 탐방하며 새로운 장소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면 풍경을 이해하기 힘들고 너무 느리면 지루하기에 적절한 해방감을 느끼기 어렵다. 자전거도 몇 년 타보았지만 안전에 신경 쓸게 많아 풍경을 이해하기 좋지 않다. 반면 시속 10km 정도의 달리기는 해방감을 얻기에는 초고속에 가까운 속도였다.


 인간은 어떤 상황일 때 스트레스를 받을까? 그중 하나는 '해방감'이 부재할 때라고 본다. 그래서인지 인간이사를 가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이는 이사하는 과정 자체가 힘들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동네에 대한 주변 정보가 없이 때문이라고 한다. 내 주변을 안전하다고 느끼고 이동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는데 새로운 동네에선 이런 안정감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서식지'에 적응 중인 동물을 떠올린다면 이해가 조금 더 쉬울까나? 이 기간의 동물은 모든 게 조심스럽고 예민하다. 그래서 이사 후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집 주변 곳곳을 최대한 돌아다니면서 동네의 지리적 구조나 인프라를 알아가는 것만으로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속초로 다시 돌아와 이 얘기를 접목시켜 보자면, 여행의 재미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여행지 주변을 최대한 많이 탐방할수록 그 지역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정을 붙이며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내가 누비는 면적의 크기가 해방의 정도라면, 누비는 면적의 넓이가 곧 나의 행복의 정도가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이 맞다면 넓은 집에 살수록 행복한 이유나, 원룸에 살더라도 주변 인프라가 잘 갖춰지면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삶을 이룰 수 있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반대로 비좁아터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 길수록 행복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도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범죄자들을 교도소에 가두는 것들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분명하게 인간이란 신체적으로 해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느끼기 마련인 법이다.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구성원이 덜 행복하다는 결과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해방의 정도가 나의 행복의 정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달리기 전의 나의 '해방반경'은 2km 정도가 채 안되었을 것이다. 왕복한 거리가 2km 정도면 걷는 속도로 30분 정도가 걸린다. 이것이 나의 과거 해방반경과 행복의 정도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 반경에 속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8km~15km 정도를 달려도 하루일과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이를 편도로 계산해 보면 4~8km 정도가 된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해방반경'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전보다 2~4배 정도는 더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달리기가 나의 해방을 위해 지속하는 달리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외면적, 내면적 목표를 설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건강보다 더 큰 가치를 얻었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원했던 외면적 목표를 얻으러 떠난 여정에서 더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주자는 각자만의 내면적 목표를 찾아간다. 달리기 자체가 내면적 목표의 여정이 되는 것이다. 나의 내면적 목표는 '해방감으로부터 오는 행복'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분들도 42.195km만큼 행복해지시길 바란다.


*속초 달리기 코스 : 청초호 → 갯배나루터 → 속초중앙시장 → 동명항 → 영금정 → 영랑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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