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F(Did not Finish)
*[별일 없이 달리기 magazine]은
평안한 달리기를 추구하며 ‘달리기와 일상’에 대한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차를 놓고서는 동료들과 셔틀버스를 타고 퇴근을 한 적이 있다. 그날은 동료들과 같이 술 한잔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약속장소까지는 차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이동 간에 어떠한 대화라도 이어가지 않으면 서먹해지기 십상이다. 남자란 술 없이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언어기능이 퇴화한 것일까? 나는 분위기의 적막을 잘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든지 꺼내서 말을 이어 붙여야만 했다. 비교적 길에 말을 이어 붙인 소재중 하나는 달리기에 관련한 것이었다. 약속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하프마라톤 참가 일정을 피해 달라는 요청을 했었는데, 팀원들에게는 마라톤이라는 소재가 신기한 소재로 다가왔나 보다.
“마라톤을 한다고 했을 때, 잘 달린다는 기준 같은 게 있나?”
”네, 10k를 예로 들면 40분에 가까울수록 상급자라고 하는 거 같아요.
서브 3이라고 해서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는 상징적 인기록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체중도 있고 조깅하듯이 달려서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못해요 ㅎㅎ;“
“그래도 경보하는 속도로 달리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ㅎㅎ”
“경보와 달리기의 사이 어딘가로 달릴 거 같은데요. 경보에 조금 가까운 속도로요…
오래 달리려면 지치지 않는 페이스로 달리는 게 중요해요. 숨이 차면 절대 오래 달릴 수 없더라고요.
일이랑 같죠. “
사실 대화를 나눈 팀원의 팀장은 얼마 전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B팀장은 수년간 열심히 일했으나 결국 *번아웃이 와서 안타깝게 퇴사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달리기도 일도 속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하게 되었다.
B팀장은 일로도 리더십측면에서도 모두에게 인정받는 팀장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실용적인걸 좋아하는 성향이기도 하고 새롭게 배운 걸 업무에 곧잘 적용하는 스타일이어서 팀원들이 우러러보았다. 반대로 B팀장은 믿고 따를 상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배움에 목말라했고 제대로 된 지시를 못 받고 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소년가장의 마음과 같았을까나. 나 또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라 적잖이 공감이 갔다.
결국 B팀장은 퇴사라는 선택으로 안식의 기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휴식을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B팀장이 매번 퇴사에 대해 고민할 때 조금 더 여유로운 속도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같은 팀도 아니고 그 또한 내 상사였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하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너무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서 아주 약간은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나 또한 일을 할 때 항상 빠르게 최고의 결과물을 내는데 노력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일에 적용하는 것도 즐기는 편이었는데 프로그래밍과 전혀 상관없는 직무임에도 코딩을 배워서 업무를 개선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도 많았다. 덕분에 고과평가도 수년간 좋게 받았고 직책부여도 남들보다 일찍 받은 편이었다.
문제는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예민해져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혼자 화를 삭이는 일이 늘었다. 아마 팀원들도 내 눈치를 많이 봤으리라. 출퇴근길에도 일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처음에는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스트레스로 변한 것이다. 행복과 스트레스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감정의 스펙트럼이 있다. 감정의 스팩트럼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사이 존재하는 감정들이 칼로두부 자르듯이 명확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흰색과 검은색 명암비 사이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흰색이고, 어디서부터가 회색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검은색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거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 스트레스는 나에게 스며들어있었다. 나는 나를 매일 보기 때문에 언제부터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졌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B팀장과 내가 달랐던 점은 나는 나의 스트레스 원인을 알았다는 것이다. 작년에 우연히 받았던 심리검사(MMPI)를 통해 나 스스로를 압박하는 '다급한 속도'가 성장의 원천임과 동시에 스트레스의 원인임을 인지했다. 한마디로 나는 일에 과몰입한 상태였다. 그리고 번아웃은 이런 워커홀릭에 가까운 사람에게 쉽지 찾아온다.
심리검사를 받은 이후부터는 너무 조급해하는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사소한 점까지 노력을 쏟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일에 대한 욕심을 조금씩 덜어나갔다. 순전히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별 탈 없는 거 보니 회사는 어떻게든 굴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회사라는 것에 자아(自我)가 있다면, 회사도 "천천히 해도 좋으니 조금만 오래 다녀줘"하고 말했을 것이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경력자를 뽑거나, 신입을 뽑아 새로 교육하는 것 자체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번거로운 일이니까 말이다. 나의 스트레스 원인을 찾지 못했으면 나도 내 속도에 이기지 못해 퇴사를 했으리라. (실제로 이직 면접도 많이 보기도 했고)
얼마 전엔 한강에서 18k정도를 달렸다. 코스는 망원에서 이촌까지 왕복하는 코스로 계획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도착지를 4k 정도 남기고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봉크(Bonk)라고 한다. 평소에는 쉽게 달릴 수 있는 거리인데 갑자기 봉크가 난 이유를 되짚어보니 그날 컨디션이 좋아서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달린 게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목적지까지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어찌어찌 완주는 할 수 있었지만, 매우 혹독한 하루로 기억에 남았다. 결국은 다음날 통증 때문에 주사까지 맞아야 했다.
나의 경우 달리기 초반부일수록 느리게 달리는 게 매우 힘들게 느껴진다. 체력이 남아돌수록 느리게 달리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로는 조금 더 천천히 달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항상 '일단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페이스조절에 실패해 후반부에 고생한다. 대회라면 분위기에 휩쓸려서 오버페이스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주의한다. 소중한 대회의 추억이 *DNF 하거나 괴로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생활에서도 달리기에 있어서도 속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항시 최저속도로 달려야 한다. 그래야 더 높은 성과를 내고 멀리 갈 수 있다. 반대로 목표를 향해 질주를 해버리면 다음 단계로 향할 힘이나 다시 되돌아올 힘이 없어진다. 특히나 나의 경우 에너지가 고갈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편이 많다. 귀찮게 생각하는 것보다 기존에 계획한 대로 밀고 나가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몸이 힘들수록 관성이 이끌리게 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결국은 부상을 입거나 *DNF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반대로 적당히 힘을 빼고 언제든지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애쓴다. 질주하고 성취하는 삶보다 유연해지고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을 쓰면서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 not Speed>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이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 말의 속뜻도 "빨리 뛰려 하지 말고, 방향을 잘 잡고 나아가라"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만 놓고 보자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방향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도 없는데 목적지라고 어디 한 두 군데일까? 과거엔 가치가 없다고 느껴졌던 것이 소중한 가치가 되고, 미래에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막상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가치가 없는 등 인생은 예측 불변의 덩어리들뿐이다. 그래서 <인생은 방향이 아닌 속도, Life is a Matter of Speed not Direction>가 아닐까.
* 번아웃 증후군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
* 봉크(Bonk)는 우리 간과 근육에 저장되어 있던 글리코겐이 소진된 상태로 봉크상태가 되면 극심한 피로를 느끼게 된다.
* D.N.F(Did not Finish), 대회를 완주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