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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뉴 Mar 30. 2019

편지 한 장, 사진 한 장뿐인 나의 엄마에게

Re. 12. 03. 30.

칠흑같이 어두운 저녁이었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나는 선임과 함께 근무를 서고 있었다. 자대 배치받고 한 달 하고 2주 뒤의 일이었다. 해안 소초 위병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소초에서 가깝게 지내던 선임 한 명이 근무 복장을 하고 뛰어 오더니 저보고 빨리 들어가서 전화받으라고 했다.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으러 들어갔다.      


“충성! 이병 OOO입니다. 행정반에 용무 있어서 왔습니다!”

“어, 잠깐만 기다려. 다시 전화 올 거야.”     


전화는 끊겨 있었다. 수화자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중대장의 말에 나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 어머니 위독하시대. 얼른 나갈 준비해.”     


미친놈이라고 말해도 상관없지만, 그때 나는 솔직히 말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말도 안 되었었다. 2주 전에 저한테 편지와 초콜릿도 택배로 부쳐 주셨고, 또한 위독할 정도로 지병을 가지고 계시지도 않았다. 그런데 위독하시다니. 누구 차를 타고 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행보관이었는지, 주임 원사였는지는 몰라도 어떤 부사관의 차를 타고 갔다. 가는 내내 울지도 못했다. 군화만 쳐다보며, 단 한 마디만 외쳤다.    

 

‘하나님 제발, 제발 이 모든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응급실 병상에 누워 계신 엄마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심각했다. 의사 또한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이등병 신분으로 군복을 입은 채 의사와 싸웠다.   

   

“당신, 말 똑바로 해.”   

 




그렇게 3월 30일 새벽 4시, 동생과 나를 남겨두고 떠나셨다. 그 뒤의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당신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이게 말이 되느냐.’ 수도 없이 묻고 또 묻고 물었지만, 하나님은 단 한 마디도 없으셨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도 나는 슬픔보단, 분노였다. 이미 나올 눈물도 없는 상태였지만, 더욱 메말라 갈수록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다. 알지 못했던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얼굴만 알았던 의외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깊은 위로를 전달해 주셨다. 아직도 장례식장이 생각난다. 거기에 머물렀던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나와 동생은 위로를 받았다.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해마다 이 즈음되면 작은 묘 앞에는 수선화들이 정말 많이 핀다. 거기에 내가 사 온 작은 꽃을 놓으면 참으로 괜찮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지막 편지 한 장과 사진 한 장만을 가지고 있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코팅까지 했는데, 사진은 점점 색이 바래지더라. 바래진다는 것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고, 나 역시 조금씩 기억이 옅어진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아직 많이 있다.      


가을날, 엄마 차를 타고 좋아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야자 끝나고 돌아오던 기억도 남아 있고, 엄청 맛있는 것들 먹던 것도 기억나고, 잔소리고 기억나고, 예전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나눴던 대화들도 기억나고, 대학 가지고 싸울 때도 기억이 난다. 어느 자식이나 그렇지만, 나는 참 못난 아들이었고, 못난 사람이었다.      


종이 구석에 남겨진 짧은 편지 한 장과 색이 바랜 사진 한 장이 오늘도 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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