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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라이어 교사 Feb 15. 2024

오후 네시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 내 마음속 타자와의 만남

 읽을 책이 없을까 밀리의 서재를 둘러보던 중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 네시’라는 책인데, 내용이 가늠되지 않는 제목일 수도 있는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내가 이 책을 읽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나는 학교에서 책벌레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 이미지를 나름 좋아했다.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한 기간에는 책벌레였다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심지어 밤에 너무 책을 읽어서 아빠가 나에게 책 좀 그만 읽으라고 말하자 아빠에게 화를 내며 책 좀 읽고 싶다고 말했던 지금 생각해 보면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학창 시절을 추억하며 회상할 만한 일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보통의 중학생들이 읽는 판타지 소설 혹은 일반적인 소설(주로 중학생 권장도서가 찍혀 있는 책들)은 내 성에 차지 않았고, 나는 베스트셀러를 지나 서가 구석에 꽂혀 있는 누구도 찾지 않는 책들을 살펴보고 읽어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책들 중 일부는 너무 인기가 없어서 내가 처음으로 그 책을 펼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중학교 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잘 읽지 않았을 책을 읽은 경험이 많다. 엄밀히 말하면 잘 읽지 않았을 책을 빌렸다는 말이 더 알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을 통해 내가 배운 내용은 거의 전무하기(감정조차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이다) 때문이다. 그나마 긍정적을 생각해 내가 배운 점을 찾아보자면 수준에 맞지 않은 지루한 책을 참고 읽으면서 자연스레 길러졌을 인내심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루소의 에밀, 체게바라 평전 등의 책을 나는 중학교 때 읽었다.


 어느 날 서가 구석을 뒤지고 있을 때 '오후 네시'라는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밀리의 서재에 있는 열린 책들에서 출간한 책은 아니었고 내 어렴풋한 기억에는 A5사이즈 짙은 베이지색 하드커버에 단순히 ‘오후 네시’라는 글씨가 적혀있던 책이었다. 하드커버였기 때문에 책의 뒤편 어디에도 책에 관한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고 생각나는 것은 책 분량이 되게 짧았다는, 두께가 두껍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 당시에 나는 그 정도 분량의 톨스토이의 단편선(느낌표에서 방송한 후 느낌표 마크가 찍혀 나온 책은 아니었고, 녹색의 작은 하드커버에 실려 있는 톨스토이의 단편선)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그 책을 골랐다.


 내가 중학생 때 읽었을 수많은 책들 중에서 왜 지금 밀리의 서재 소설 탭에서 그 책이 보였는지 이유를 붙이면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난해함이 정말 컸기 대문이다. 당시 내가 책을 읽은 후에 든 생각은 흠... 오후 4시에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주인공의 집에 지속해서 나타난다는 내용인데...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라는 의문 투성이었고 여기에 담겨 있는 작가의 의미, 물론 지금도 작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다. 교사로서 말하자면 책을 읽은 후에 독해가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중학교 시절 '오후 네시'는 미지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그 뒤로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책을 읽은 후 기록하는 공간에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책에 관해 쓰는 것은 이 책이 바로 내가 몰랐던 나를 찾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에밀은 고전 언어를 가르쳤던 정년퇴직한 교사로 퇴직 후 자신의 아내와 함께 시골에 있는 집을 구입하여 여생을 보내기로 하며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 집 옆에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에서 사는 의사인 베르나르댕 씨는 오후 4시가 되면 에밀의 집에 들어와서(침략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정확히 2시간을 보낸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 책의 주요 이야기는 에밀의 집에 들어오는 베르나르댕씨로부터 촉발된 주인공의 내외적 갈등을 다룬다.


  갈등 속에서 주인공인 에밀은 자신과 타인(베르나르댕)의 '관계'에 관해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첫 만남을 유치원에서 하고 그 후 결혼하여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는, 그래서 결혼 생활 기간을 계산할 때 유치원 때부터 계산한다, 자기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아내와의 갈등 속에서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관계'의 벽을 느낀다. 심지어 자기 속에 존재하는 지금까지 자기가 인지하지 못한 자기 속 타인과의 '관계'도 형성된다. 불청객의 침입으로 인해 지금까지 몰랐던 관계를 발견하며 이 책이 끝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결말 부분에 일련의 사건과 에밀의 사고를 통한 깨달음을 통해 그 관계를 다시 뒤집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대사를 하나 기록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의 태도는 죄수의 그것이 아니었던가. 처음에 매일 두 시간씩 우리 집에 와서 죽치고 앉아 있었던 그의 태도는, 다른 죄수의 독방을 침입하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가엾은 죄수의 모습이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그렇게 폭식을 했던 것은 권태의 절정에 달한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 양태였다. 자기 아내에 대한 그의 가학적 성향 역시 감금된 자의 행태였다.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될 대로 되라는 태도, 그의 불결함, 그의 지저분한 매무새는 종신형의 죄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집을 매일 오후 4시에 방문했던 불청객을 에밀이 일련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처음에는 그를 항상 자신과는 다른, 멀리 떨어져 있는 타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해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에밀은 도덕과 공감의 딜레마 속에서 모순적인 판단을 내려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에밀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에 대한 혼란이 깊어지며 이 책은 마무리된다.


 극적인 사건을 겪으며 관계를 재발견하고 자신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혼란 속에서 이 책이 마무리되며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지만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과거의 나와 긍정적 관계 맺기를 생각해 보았다.


 15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냥 읽고 도서관에 반납했던 나와 지금 이 책을 읽으며 내용을 이해하며 책을 읽은 후에 역자의 말이나 작가와 관련한 글들을 찾아 읽으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모습. 15년이 지나는 동안 내 독해력이 조금은 향상됐음을 느낄 수 있었고, 또 그 과정에는 15년 전 무작정 책을 찾아 읽어 나갔던 내 모습이 이 독해력에 공헌했을 것이다.


 추가로 어제 아내에게 이 책의 내용과 느낀 점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도 나름 강의를 여러 번 나가며 내 전달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의문스러운 표정에서 나의 전달력은 형편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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