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어딘가 근엄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여행을 가면 들리는 박물관을 생각해보자. 런던의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나라만해도 크고 긴 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떠오른다. 웅장한 건축에 중대한 역사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을 깨는 곳이 있다. 바로 '일상이 전시가 되다'라는 가치 아래 세워진 갤러리더월, 순수박물관이다. 일상이 전시가 어떻게 된다는 걸까? 흥미로웠다. 그런데 직접 다녀와보니 더 흥미로웠던 점은 따로 있다. 그저 전시뿐만이 아니라 공간, 설립 배경 하나하나가 '일상이 어떻게 전시가 되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기 전에 먼저 순수박물관의 위치를 확인해본다. 네이버 지도 상에 등록된 이름으로는 '갤러리 더월'. 위치를 보니 해방촌 한가운데 위치해있다. 후암동과 해방촌 일대는 방문할 때마다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남산타워가 보이는 아래 정겨운 골목, 이따금 마주하는 미군기지의 흔적... 이번에는 또 어떤 공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박물관이 으레 지하철역과 가까운 것과는 달리 순수박물관은 역에서 조그마한 마을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야 한다. 후암동-해방촌 일대에서 마을 버스를 탈 때면 어김없이 언덕과의 밀당이 시작된다. 내려서 걷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촬영금지를 붙이고 우뚝 선 군인아파트. 역시나 이 일대는 항상 존재해왔지만 잘 몰랐던 역사를 마주하게끔 해준다.
그렇게 도착한 순수박물관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곳은 25년 된 다가구 적벽돌 주택을 개조해 만들었다. 바닥과 맞닿은 층이 시원하게 난 유리창을 통해 빼곰히 보였다. 입장하자마자 눈길을 잡아끈 건 감각적인 1층의 카페였다. 마치 고급스러운 바에 온 듯했다. 차분한 검정색 톤에 따뜻한 우드톤이 묘하게 어울렸다. 돋보이는 테이블마다 달려 있는 펜던트 등은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알바 알토의 것. 1936년 헬싱키 사보이 호텔을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오래된 조명이 순수박물관의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잘 어울렸다.
박물관을 관람하기에 앞서 갤러리의 관장님이 간략하게 안내를 해주신다. 이 곳은 관장님의 신혼집이었던 주택을 일상의 가치를 담은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테이블 한 켠에 순수박물관 개조 일지를 고스란히 담은 책자가 있어 그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며 공간을 소개하는 관장님에게서, 자기 공간을 꾸린 사람의 애정이 느껴졌다. 이 박물관이, 주택이 살아있는 기분이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사실 순수박물관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 저 멀리 터키에 원조 순수박물관이 있다.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낡은 주택을 개조하여 2012년 순수박물관을 만들었다. 미래 박물관의 모습은 더 작아지고, 일상의 가치를 전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말이다. 이에 영감을 받아 관장님이 한국 해방촌에 갤러리 더월, 즉 본인만의 순수박물관을 만든 것이다. 신혼집이 그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제 오디오 해설을 통해, 이 박물관-주택을 탐험해볼 시간이다. 이 오디오 해설은 많은 박물관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순수박물관의 오디오 해설은 어려운 역사를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취지나 간단한 설명만 곁들였다. 살짝 가이드만 잡아 주고 경험은 각자 해보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주택을 개조하여 만든 곳인만큼, 각 층과 각 방마다 미로처럼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순수박물관의 작품은 한 사람의 인생 굴곡만큼이나 다양하다.
순수박물관의 취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관장님의 추억이 담겨 있는 악기.
아들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빼곡한 장난감을 보며 인생의 한 조각을 경험한다.
뿐만 아니다. 신진작가들의 다양한 그림과 미디어아트.
소리까지 실감나는 외계 공간에 온 것 같은 이색적인 공간까지...
각 공간과 전시가 순수박물관을 기획한 한 사람의 서사를 담고 있다. 다만 그것이 어디 유명한 영웅의 일대기처럼 지극히 사적이라거나 영웅시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상에서 출발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즉 예술을 즐기는 색다른 방식을 제공하는 셈이다.
이 공간을 관람하는 내내 오롯이 나와 동행한 지인만의 세상이었다. 예약제로 운영되고 관람 시간이 겹치지 않게 조정해주시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다른 박물관에서 쉽사리 할 수 없는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코로나 시기 오프라인 공간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방역과 기타 문제로 '프라이빗함'을 제공하는 공간이 늘고 있다. 꼭 호텔같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보통 그럴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순수박물관에서는 커다란 3층짜리 주택을 맘껏 우리가 사용해볼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의 질이 달라진다. 조용히 전시에 몰두할 수 있으니 전하고자 하는 바를 더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신나고, 더 들뜨게 된다. 사람이 붐비는 곳을 피하고 싶은 이 시기에, 너무나도 안성맞춤이기도 하고.
사실 해방촌은 그 이름에서부터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해방촌 일대에 경성 호국 신사를 지었다. 그렇다, 신사 참배를 위한 그 신사 말이다. 그 부지는 너무나도 커서 해방촌 108계단부터 순수박물관이 위치한 곳까지 이를 정도였다. 참고로 그 108계단은 신사를 올라갈 때 우리 국민이 올라가야 했던 높디 높은 계단이었다. 이 일대, 그리고 지금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순수박물관까지 역사가 얼룩졌던 셈이다.
그리고 일제가 물러간 뒤, 이 곳에는 미군기지의 담장이 세워졌다. 공교롭게도 순수박물관과 바로 맞닿아 있다.
길게 낸 창으로 미군기지의 담장이 고스란히 보여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별한 느낌을 선사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담장 위 매섭게만 보였던 철조망의 모양에서 하트가 보인다는 거다. 이것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전시품도 있었다. 뭐랄까, 순수박물관을 둘러싼 일련의 공간 경험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혼집이었던 평범한 주택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박물관으로 변했고
아픈 역사가 있던 공간에 다시 단절의 공간이 들어섰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는 꽉 막힌 기지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지역성을 만날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
지역 깊이 뿌리내린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만났다. 새롭고 또 새롭게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전시를 마치고 나면, 깜짝 선물처럼 나를 반기는 공간이 있다. 바로 루프탑이다. 정말 이정도면 끝판왕 아닌가. 각 층마다 이렇게 매력적인 공간과 콘텐츠가 존재한다니. 이 공간 하나만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폭이 이렇게나 넓다.
루프탑에서는 담장 속 막혀있던 미군기지의 모습이 일부 내려다보인다. 그 반대편으로는 철망으로 막힌게 아쉽긴 하지만 해방촌 일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곳 역시도 예약제로 사용되기 때문에 프라이빗하게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잠시 1층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그 공간을 맘껏 누리다, 다시 이곳으로 올라왔다.
둘이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왁자지껄 깔깔 소리가 들려왔다.
도무지 이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놀란 눈으로 지인과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우리는 그 소리가 바로 앞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차렸다.
야자로 힘들었지만 기운이 넘치고 시끌벅적했던 우리의 고교 시절을 떠올리며 푸하하 웃음이 나왔다.
촬영금지가 붙어있는 매서운 아파트나 높이 담장 둘러싼 기지 바로 앞에 웃음소리 들려오는 학교가 있다.
다른 곳에서 들었다면 그냥 웃고 넘겼을 그 활기찬 소리가, 이곳에서만큼은 지역과 공간의 무궁무진한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전시하고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평범해보이는 지역이라도, 그 속의 이야기가 있다.
평범해보이는 건물이라도, 공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라는 걸, 순수박물관에서 보낸 시간 동안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 계속 남은 이야기는, '나만의 순수박물관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있는 지역에서, 어떤 건물이 될까?
어떤 일상이, 어떤 기억의 조각이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