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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Mar 06. 2020

리듬이 깃든 이미지들.

이병윤_[유월] 그리고 PTA_[아니마]

일 년 내내 온난한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건강할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한겨울이나 한여름이 되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몰리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이 뚜렷한 계절 변화가 감사할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봄 냄새를 맡을 때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봄 내음을 맡으면 비로소 숨이 트인다.


매년 봄이면, 나는 어김없이 봄노래와 봄 영화를 본다. 재작년에는 이상은의 데뷔 시절 노래를 즐겨 들었고, 작년에는 재즈 피아노를 듣고 왕가위와 레오 카락스를 다시 보며 봄을 기념했더랬다. 시계 없이도 제때 잠에서 깨는 동물들의 생체리듬처럼,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봄 영화를 만난다.



봄 햇살의 따사로움, [유월].


6년 전에 내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인터넷으로 독립영화를 모아 볼 수 있는 곳은 유에포(yoUeFO)라는 사이트였다. 거기서 나홍진 감독의 단편, [완벽한 도미요리]를 봤다. 지금 그 사이트는 접속이 안 되는 것 같다. 괜찮다, 지금은 유튜브가 있으니까. [유월]은 유튜브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다. 가끔씩 무분별한 시청으로 유튜브를 손절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유튜브라는 플랫폼으로 인해 누군가의 작품이 이렇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기쁜 일인지.


[유월]은 한예종 영상원 이병윤 감독의 졸업작품이다. 영화는 스치기만 해도 춤을 추게 되는 이상한 전염병이 돌고 있는 유월이의 꿈속 세계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유월이 꿈에서 깨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며 끝이 난다. 그의 꿈속에서 담임 선생님은 규칙을 중시하고 벌을 준다며 학생들을 협박하는 인간인데, 유월이가 퍼트린 이상한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다 그만 유월이와 근사한 듀엣으로 춤을 추게 된다. 여기서 유월은 어른인 선생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위로하는데, 선생의 책상 위에 발레 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꿈속에서 유월은 내면의 열정을 숨기고 살아가던 담임선생을 위로한 것이었을까? 후반의 아이들 군무 시퀀스도 모호한 면이 있다.


썩 울림이 있는 영화는 아니더라도, 통통 튀는 아이들의 군무가 봄기운에 딱 맞아떨어진다. 알고리즘이 내게 이 영화를 들이민 지 좀 됐는데 이제야 보게 된 것은 아마 이런 시의성(봄이라는 계절) 때문이었을까?

차가운 계절 끝에 [아니마]가 왔노니.


[미국 영화의 역사] 시간의 최종 발표 주제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꼽았을 정도로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을 좋아한다. [매그놀리아]는 단연 최고의 영화 중 하나고, [펀치 드렁크 러브], [데어 윌 비 블러드] 등 작품 하나하나 실망시킨 적이 없는 그다. 몇 년 전 전주 영화제에서 [주눈]이 공개됐을 때 꼭 보고 싶었으나 기회를 놓쳤는데, [아니마]는 넷플릭스에 있기에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아니마]는 지하철에서 눈이 맞은 여자가 두고 간 상자를 가져다주는 남자의 여정을 그린다. PTA는 일렬로 늘어선 행렬 속에서 미끄러지고, 헤매는 남자의 모습을 그저 빛과 무대 하나로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끝내 그는 여자를 만나고, 둘은 서로의 눈과 코를 맞대며 미끄러지는데 그 광경을 보면 얼었던 마음도 사르르 녹는다.


톰요크의 앨범, [ANIMA] 수록곡이 펼쳐지는 이 가상의 무대에서, 춤 또한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말이 없던 먼 옛날에 사람들은 눈빛과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눴겠지.



두 영화(혹은 뮤직비디오라고 해야 할까?)를 이끄는 것은 직,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내러티브가 아닌 리듬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군무를 추고, 모든 이가 특정 박자를 지키며 고개를 까딱일 이유가 없잖은가. 이 리듬은 처음엔 조금 불화하는 듯 보이다가 끝내 하나의 통일된 몸짓이 된다. 유월이가 선생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돌아와 친구들, 선생님과 추는 군무가 그러했고 똑같은 춤을 추는 사람들 속에서 만난 남녀의 눈빛이 그러했다. 이 둘의 내러티브와 연출은 작위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환상과 꿈의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화해하고 서로 같은 춤을 춘다. 이 리듬감 있는 율동이 사람들의 감정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린다.

어떤 봄날, 우연찮게 춤이 등장하는 영화를 내리 봤다. 따스한 이미지들이 내 마음을 녹인다. 내게 [유월]을 추천했던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옳았다. 이 영화들을 굳이 지금 본 것도, 보고 나니 마음 한자리가 따스해지며 어딘가 모르게 헛헛해지는 것도 모두 봄이 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마침 영화를 다 보고 나니 해가 중천에 떴다. 오늘은 즐거운 노래를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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