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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솜 Nov 25. 2022

당신은 장녀입니까?

심리적 & 경제적 독립의 방해요인


활동하는 단톡방(글쓰기가 메인)에서 급 설문이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20명이 활동하는 가운데, 18명이 장녀이고 그 중 2명은 외동인 것을 알고 우리는 장녀들의 모임인가? 하며 웃으며 지나갔는데요. 왜 이렇게 장녀들로만 구성되었을까 고민하면서 진정 우리는 K-장녀들의 한을 풀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인가? 하는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K장녀로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억울함? 부당함? 등을 얘기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좀 고민해보다가, 왜 장녀들이 정서적-경제적인 측면에서 독립을 어려워하는지를 성장 과정에서의 학습과 부모의 심리적 요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어요.  


사실, 장녀뿐 아니라 장남들도 많은 부담을 갖고 성장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만, 왜 장녀들은 부당함을 더 느끼게 될까요? 제가 생각하는 대표적 이유는 다음 세 가지 입니다.




첫번째. "첫 딸은 살림밑천" 이라는 학습 효과의 부작용


저 말은 남아선호사상이 뚜렷하던 시절, 첫째로 딸을 낳은 경우에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아들에게는 대를 잇는 존재라며 우리 큰아들, 우리 종손이라는 호칭을 해주면서, 첫 딸에게는 살림밑천이라며 집안을 일궈주는 대상이 생겼다는 의미의 위로만이 건네졌지요. 출생부터가 부모에게 타인의 위로를 건네받는 존재였으니, 그 위로에 부흥하여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태생적 부담감을 지니게 됩니다.


살림밑천은 "살림" + "밑천" 단어의 합성어이죠. '살림'은 세간, 즉 집안 살림을 말해요. 그럼 '밑천'은? 사전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데 바탕이 되는 돈이나 물건, 기술, 재주 따위를 이르는 말" 로 정의됩니다. 즉 이 살림밑천이란 말은 대상의 출생을 즉각적으로 물질적 존재로 변환시키는 위험한 단어인 거죠.


단어 자체가 노동력과 경제력을 가져와서 집안을 일구는데 쓸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말이기에, 장녀는 집안 살림을 일정 부분 수행해야 하며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도 일부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규정됩니다. 적어도 지금 아이를 양육하는 30-40대 여성들은 본인의 자녀들에게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엄마인 그녀들은 성장 과정에서 저 말을 들으며 자라났고, 무의식적으로 '나도 가정의 경제적 역할을 일부분 수행하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재화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가족의 경제적 상황을 나아지도록 일조하는 존재라는 암묵적인 메세지를 성장기 동안 학습하면서, 성장기 동안에는 가정 살림의 일부는 수행하고 양육을 돕는 노동력의 제공자로, 경제적 활동이 이뤄지는 순간부터는 실질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부모는 때로 비합리적인 책임감을 지우게 되고 경제적 영역에서는 장녀의 독립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장녀는 경제적 역할 수행과 관련해서 부담스러운 책임감, 부당함과 억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욱이 자신의 경제적 독립이 가족의 경제적 안녕을 위해하는 요인으로 인식될 수도 있기에, 경제적 독립과 관련하여 갈등이 발생되고 독립을 선언할 때에는 부모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도 많아집니다.


경제적 독립을 비난하는 경우가 비단 장녀에게만 해당되느냐고 비난하면서 이것도 페미적 사고와 발언이라고 오해석할 수도 있는데요. 우선 이 글의 시작은 대체적으로 장녀의 독립에 서운해하고 비난받은 장녀들이 출발점이기에, 상기 지적과 같은 발언은 배제합니다. 그럼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에 국한된 해석이니 일반화하기에는 오류가 있지 않냐고 비판할 수 있지만, 모든 연구가설과 결과가 그러하듯 표본집단이 갖는 결과를 일반화하여 해석할 때의 한계는 항상 있는 것이기에, 그런 비판들도 다 뒤로 미뤄두기로 합니다.


보통 경제적 독립이나 금전적 도움(장녀의 입장에서는 부담)의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의 서운함과 소위 "맞짱"을 떠야하는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아빠보다는 엄마가 더 많아요. 집안살림을 하는 게 엄마이고 엄마는 이미 딸이 가져올 돈을 집안살림의 한 부분으로 책정하여 가계운영을 세울 가능성이 있기에 , 거부감의 강도는 생각보다 거셉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비난의 강도도 세집니다. 아니 자녀가 독립하는 건 당연한 건데, 왜 부모는 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장녀인 우리는 이 비난과 거부감을 오롯이 견뎌내고 쟁취해야 하는 걸까요?



두번째. 정서적 분리 거부 _ 공생적 관계의 소망 & 역할 분담


예전에는 아들이 없어서 노후의 돌봄을 못 받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많았던 반면, 요즘에는 딸이 없는 집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유는? "엄마에게는 딸이 필요한데, 아들은 결혼하면 필요없어. 엄마 마음 이해해주는 딸이 최고야." 네, 그렇습니다. 태생적으로 딸에게 부여되는 역할 중에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 엄마의 정서적 고통을 공유해주는 사람이라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성격마다, 집안의 분위기마다 다 다르다기에 일반화의 위험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들보다는 딸과 정서적 공유가 많이 이뤄집니다. 그만큼 심리적 의존도가 높아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딸을 통해 대리만족하고자 하는 욕구도 큽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이나 부담도 딸에게는 공유하며 딸을 통해 위로와 보상을 얻고자 하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특히 장녀에게는 앞서 말씀드린 "살림밑천" 이라는 전제 조건이 디폴트로 탑재되어 있기에, 심리적 고통 분담과 의존뿐 아니라 경제적 부분에 대한 상황을 공유하며 집안의 어려움을 같이 분담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여러 루트를 통해 학습당합니다. 또한 '착한 아이'라는 메세지를 끊임없이 주입받게 되지요.


"네가 첫째니까 집안 일에 더 신경을 써야지."


"네가 동생을 챙겨야지, 우리(부모)가 가고 나면 남는 건 너희들 뿐인데 네가 더 챙겨줘라."


"이번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많이 생겨서 큰 일이다. 블라블라~" (네가 신경써서 알아보고 도움도 줘라)


"이번 일은 너만 알고 있고 동생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걱정한다." (네가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라)


"동생을 잘 돌보는 게 착한 아이란다."


등등... 남매임에도 남동생은 집안 일을 처리하는데 배제됩니다. 괜하게 왜 동생까지 신경을 쓰게 만드냐는 게 부모의 입장이지만, 그럼 왜 장녀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처리해야 하는 역할까지 부여받아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자녀임에도 일을 처리해주는 역할의 자녀와 돌봄을 받는 역할의 자녀는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참 마음이 복잡미묘해질 때도 많아집니다.


나이 차이라고 해봐야 고작 2-3살 차이. 많이 나봐야 5-6살 차이인데, 동생의 출생과 더불어 첫째들에게는 큰 아이의 역할이 부여되고 어른스러움이 강요되며, 성장과정을 거칠수록 보호자의 역할까지도 병행하도록 언어적-비언어적 훈육을 받습니다. 또한 부모님의 갈등 상황에서는 한쪽 부모와 동맹을 맺으며 반대측 부모를 비난해야 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정서적 공유를 빌미로 비난의 대리자 역할까지도 수행하게 되는 것이죠.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는 경우, 동맹을 맺은 부모(딸들의 경우 모)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고 동맹을 맺지 않은 반대 부모(딸들의 경우 부)에 대한 부적절한 대인상을 형성하면서 추후 이성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도 심리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더불어 이성관계를 맺고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 원가족을 벗어나게 되는 걸 부모 역시 불안해하면서 자녀의 독립을 방해하는 경우들도 생겨나게 되지요. 정서적 분리도 거부하지만, 이로 인해 부가적으로 발생되는 경제적 독립을 막아서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과정 중에, 독립과 관련한 가족 내 갈등을 경험하였다면 아마도 위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이 그 기저에 깔려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결혼까지도 방해받는 장녀들이 상기 과정을 겪어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번째. 기억의 왜곡 .. 부모의 늙음을 비추며 다시금 돌봄 역할의 수용으로..


독립 갈등이 팽배해지고 일정 부분 심리적-경제적 분리가 이뤄지고 난 이후가 되면, 장녀들도 때로 부모들과 성장과정 중에 경험한 어려웠던 마음을 개방할 기회와 순간이 생겨납니다. 헌데 이럴 때마다 참 서로의 기억이 다릅니다.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의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라는 가사처럼, 내 기억과 부모의 기억이 다름을 종종 당면하게 됩니다. 특히 경제적 부분에서 장녀가 스스로 노력하며 부담해온 것들을 부모가 제공해준 것처럼 인지되는 경우들이 많고 때로는 동생들보다 더 챙김을 해주었다고 오인하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추정컨대 자녀들에게 동일한 사랑과 관심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일반화의 오류가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불어 첫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로서도 처음 경험해야 했던 시행착오와 심리적 에너지의 투여가 컸던 만큼, 큰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하는 믿음에서 파생된 기억의 왜곡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경제적 부분에서 장녀가 제공하는 부분은 평가절하되는 반면, 동생들이 제공한 부분은 과대평가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죠.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장녀(첫째)에게 이미 주어진 역할은 살림 밑천, 경제적 역할을 분담해주는 사람이라는 디폴트값이 늘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돌봄을 받는 역할이 디폴트값으로 깔여있기에, 그들의 경제활동과 가정에 지원을 해주는 역할은 기대되지 않던 행동이고 그만큼 부모에게는 뜻밖의 행동이자 기특한 행동이 되기에 과대평가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기억의 왜곡과 마주하게 될 때면, 왜 내가 해온 것들은 당연한 걸까? 내가 한 노력은 어디로 사라진걸까? 왜 이렇게 과소평가되지? 하는 의문들과 더불어 억울함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내 기억과 다른 그들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어 당황하게 됩니다. 특히 아등바등 노력하며 성취해오고 일정 부분 가정을 위해 분담해왔던 경제적 제공에 대해 과소평가 당하는 경우들도 많고 때로는 이 부분들이 잊혀진 대목에서는 화와 억울함이 배가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전후맥락을 설명하고 명확한 근거들에 기반해서 조목 조목 설명하여 왜곡을 바로 잡으면, 역으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기억해서 따지는'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계산적이라고 공격받기도 하지요. 동시에 "내가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 때문에 블라블라~" 하면서 읊어대는 과거사들 통해 기억의 왜곡을 타당화하는 현장을 다시 한번 목도해야 합니다.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지만 맘 먹고 싸우지 않으려면 참아야죠.. 끙.. 내가 해온 역할은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기에 평가절하되거나 잊혀지는 상황에 당면할 때의 억울함이란... 이럴 때에는 참 서운하고 외로워집니다...


누군가는 부모와 대화를 나눠보라고도 합니다. 물론 독립의 과정을 거치면서 싫건 좋건간에 싸움과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되죠. 그리고 그동안 쌓인 불만들도 서로에게 독설을 뿜어내듯 쏟아내는 시기들도 거칩니다. 일명 맞짱을 뜨면서 내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때이고, 그래야만 심리적-경제적 독립이 일정 부분 이뤄지니까요. 더불어 나이가 들어가면서 심리적-경제적 분리가 좀 더 확실해지기에 장녀로서 경험한 내 생각과 마음을 얘기도 하고 서운함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들도 생겨나는데요. 이럴 때 부모님의 늙은 모습을 마주하며 하나 하나 따지고 싸우고픈 전의가 사그라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억의 왜곡이 발견되는 상황이 생겨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목조목 따지지 않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또한 장녀에게 부여된 돌봄 역할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제가 생각하는 요인은 이렇게 세 가지에요. 다른 요인들도 더 있겠지만, 그것들은 나중에 더 생각나면 정리해보는 것으로 해봅니다. 기술해놓고 보니,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장녀 역할에 외롭고 지치는 경우들이 많았구나 싶습니다.


혹 당신이 장녀라면,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 마지막으로, 혹여나 이 글을 읽고 부모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운운하는 분들이 계실까 하는 노파심에 굳이 다시 얘기를 하자면, 이 글은 부모에 대한 원망을 담은 글이 아닙니다. 장녀로서 받게 되는 심리적 어려움, 경제적 부분에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한다는 부담감 등의 요인이 뭘까를 고민해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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