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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팔 Jun 24. 2024

다정함을 찾아 수많은 우주를 여행할 거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수많은 선택의 길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퇴근 후 저녁으로 마라탕을 먹을지, 칼국수를 먹을지에 관한 것부터, 회사를 계속 다닐지 관둘지, 이 남자와 결혼을 할지 말지. 선택들은 때론 사소하기도, 때론 내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크고 중요하기도 하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세계관에선 이런 수만 가지 선택의 결과가 모두 다른 우주를 형성한다. 퇴근하고 마라탕을 먹는 것을 선택한 우주, 칼국수를 먹는 것을 선택한 우주. 수많은 우주들 속엔 각각 다른 선택으로 다른 모습이 된 내가 존재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우주의 에블린은 모든 에블린 중 가장 안 풀린 에블린이다. 한 마디로 최악의 에블린. 이 우주에선 모든 선택이 그녀를 실망으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알파 웨이먼드는 왜 수많은 에블린 중 가장 잘 안 풀린 에블린을 찾아온 걸까? 모든 것이 다 안 풀렸다는 것은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빌런으로 등장하는 조부 투바키는 최고의 에블린, 알파 에블린에 의해 모든 시간, 모든 사건, 모든 우주의 자신을 다 경험하고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게 수많은 선택의 결과를 전부 경험한 조부 투바키에겐 허무만이 남았다. 모든 선택이 실패인 에블린에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조부 투바키에겐 오히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최악의 에블린이야말로 우주를 혼돈에서 구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다.


나와 같은 걸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던 거지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가 어떠한 이유로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하지만, 조부 투바키는 자신과 함께 떠날 사람을 찾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고 함께 갈 수 있는 사람. 그러면 적어도 혼자 떠나지는 않아도 되니까. 에블린은 조이가 동성애자가 된 것도,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고 살이 찐 것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도  다 악마 같은 조부 투바키가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에게 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조부 투바키가 바로 그녀의 딸이었고, 조부는 엄마가 결국 자신과 같은 길을 가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하고 허무에 빠져버린 조부 투바키는 왜 에블린과 같이 가고 싶어 했을까?


 '엄마'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나를 열 달 동안 자신의 몸속에서 품은 사람.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준 사람. 피와 살을 나눠준 사람. 한 때는 한 몸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많이... 달라진 사람.

그래도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였기에,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이해해 주길 필사적으로 바란다. 조부 투바키도 이런 마음으로 에블린을 찾아다녔던 것일까? 아무리 이상한 모습의 자신이라도 엄마는 나와 함께 해주었으면, 내가 가는 길을 같이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의 엄마와 나 역시 너무 다른 사람이다. "엄마가 그냥 내 또래였으면 엄마 같은 사람이랑 절대 친구 안 했어." 하는 나에게 엄마는 "난 너 같은 애랑 말도 안 섞어."라고 할 만큼 우리는 다르다. 그런데 또 너무 비슷하다. 옆집 할머니가 나눠주는 반찬이 부담스러워 괴로워하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따뜻하기만 한데 왜 그러냐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이 괴상한 내 맘을 안다. 착한 일인 거 알지만, 그 친절로 누군가를 내 선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그 마음. 이 얘기를 털어놓으며 "역시 엄마는 세상에서 날 제일 잘 이해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또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인생을 먼저 살아간 입장에서 그런 마음이 괴상한 게 아니야, 이런 사람 있고 저런 사람 있는 거지. 위로 같은 조언을 던지기도 한다. 

 조부 투바키도 괴상한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는 게, 허무에 몸을 던지는 게,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남들과 다르고 조금 이상한가 싶기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에블린을 찾아간 것이다. 엄마에게 향하는 본능을 따라서.


 조부 투바키의 예상대로 에블린은 모든 우주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조부 투바키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허무에 빠져버린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를 엄마 에블린이 딸 조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 에블린의 성장 영화라는 관점으로 볼 때, 허무에 빠진 에블린은 딸에 동화되는 단계이다.


※개인적 생각이며 심리학 같은 것과 전혀 연관 없습니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른 줄 알았는데 부정적 모습까지 닮아있던 에블린과 조부 투바키(=조이). 내가 보는 것을 보고, 나와 함께 가줄 사람이 인생에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때론 완전히 다른 사람도 필요하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그런 존재가 필수적이다. 에블린 가족에겐 그 존재가 바로 아빠 에드워드이다. 알파 에드워드와는 정반대인 답답하기만 한, 인형 눈알이나 붙이고 다니는 이 우주의 에드워드. 다들 피 철철 흘리며 싸우고 있는 와중에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들 왜 이렇게 싸우는지 모르겠어! 너희들도 그냥 혼란스러운 거 아냐?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영화를 보는 내내 참... 에블린은 우리 엄마 같고, 에드워드는 우리 아빠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전형적인 아시안 가족인 것인가. 여하튼, 이 답답하기만 했던 아빠 에드워드가 온 우주의 해결책을 던진다. 다정함. 사실 에블린이 에드워드를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정함을 베풀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요즘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정함은 사치이니까. 현실에 치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사실은 너에게 잔소리를 하기보단 그저 같이 있고 싶었다고. 규칙이고 뭐고 필요 없이, 내가 사랑하는 내 딸 너의 곁으로 가고 싶다고. 네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세상이 너무 팍팍해서 엄마인 나도 잊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여기저기 치이고 치어 사랑하는 그 따뜻한 마음이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잊고 산 것이다.

 움직여서는 안 되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돌 조이가 낭떠러지로 뛰어내리자, 돌 에블린도 그 뒤를 따른다. 그 장면을 보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네가 가는 길이 낭떠러지일지라도 너와 함께 할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 내 딸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라니 몸에 안 좋은 음식은 먹지 말고 이 모든 잔소리가 나의 사랑이었단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비록 지금까지 나도 잊고 있었지만 말이야.


함께하자. 한 줌의 시간일지라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는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러 시각으로 분석을 해 볼 수 있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은 '가족'이었다. 멀티버스라는 우주적인 스케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게 커다란 우주도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가족의 사랑 아닐까?

 수많은 영수증을 다 들고 긴장된 마음으로 가족들과 모두 다 같이 세무서에 갈 수 있는 삶.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도 짧디 짧은 이 한 줌의 시간도, 사랑하는 네가 있어서 소중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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