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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팔 Jul 20. 2024

비록 오늘 하루는 완벽하지 않았을지라도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

2020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일본은 공중 화장실의 인식 개선을 위해 The Tokyo Toilet Project를 시행한다. 이 프로젝트의 홍보를 위해 도쿄 시는 빔 벤더스 감독에게 4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어줄 것을 의뢰했다.

하지만 빔 벤더스 감독은 4편의 단편 영화 대신 도쿄 시의 화장실 청소부 한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담은 한 편의 장편 영화 제작을 기획하고,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탄생하게 된다.

The Tokyo Toilet Project의 공중 화장실, https://www.tsunagujapan.com/


영화 <퍼펙트 데이즈> 히라야마 役 야쿠쇼 코지

야쿠쇼 코지

빔 벤더스 감독은 캐스팅 과정에서 야쿠쇼 코지의 전작들을 보고, '영화 속 한 사람을 연기할 배우는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캐스팅이 매우 옳았다는 것은 영화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작품성을 완성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가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역할에 대한 연구와 준비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해내서 연기 코칭 해준 청소부가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저 겉핥기식으로 인물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 그 자체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준비 과정을 이렇게 완벽히 거친 만큼 야쿠쇼 코지는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를 완벽하게 연기한다. 그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야쿠쇼 코지라는 배우가 아니라 도쿄의 한 청소부의 얼굴만이 기억되어, 사람들이 도쿄 여행을 와서 공중 화장실을  사용할 때 히라야마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영화를 본 관객이 도쿄의 공중 화장실을 방문한다면, 아마 누구라도 히라야마를 찾게 될 것이다. 그는 야쿠쇼 코지라는 한 인간을 비워내고 히라야마를 담아내는 것에 완벽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히라야마는 누구인가?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진 않는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오히려 그가 누군지 더 알 수 없어진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그의 삶에 너무 깊게 개입하지 않으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관찰한다. 카메라는 히라야마를 비추고 있지만, 그에 대해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래서 관객은 더 인물을 바라보게 되고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도록 히라야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도 말을 안 해서 처음엔 히라야마라는 인물은 말을 못 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꼭 필요한 대화조차 손짓 정도로 끝낸다. 하지만 그가 어린 아이나 장애인, 자신의 조카와 대화하는 것을 보면 그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대화를 피하는 인물로 보인다. 타인과 목소리를 나누며 대화하는 것은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보이는 표정과 들려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상대를 보다 깊게 알 수 있게 하며, 때로는 애정을,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연민을.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히라야마는 이런 사람과의 관계와 판단, 감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에 대화를 피한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히라야마의 삶이 부러웠다. 혼자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청소를 하고.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사회가 정한 낮은 곳에서 나만의 평온과 행복, 규칙을 아는 삶.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는 일은 나 같은 사람에겐 대단히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꾸며내고, 관심을 가지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삶... 나이를 먹을수록 더 자주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히라야마처럼 나만의 세계 안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는 수천수만 번 상상해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 그건 '추락'하는 것이니까. 히라야마 역시 처음부터 이런 삶을 산 것은 아니란 걸 영화에 등장하는 몇 권의 책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책을 통해 엿보는 삶

히라야마가 읽는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엔 Nothing과 Sad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장이 나온다. 아무것도 없음과 슬픔. 히라야마는 Nothing, 어쩌면 죽음으로 볼 수도 있는 그것과 Sad 중 Sad를 선택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괴로움과 외로움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과거에 일련의 사건이 있었고 삶을 포기하는 것과 슬픔을 이고 살아가는 것 중 후자를 선택해 본래 속한 곳에서 떨어져 나와 그 대가와 함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Eleven>은 히라야마의 조카가 그의 집에서 읽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짧게 소개하면,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하며 집 안에 갇혀 살던 주인공 소년이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사 온 자라를 보고 자신의 반려동물로 여긴다. 자라는 소년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사실 자라는 식용 자라였고, 어머니가 자라를 끓이고 있는 모습을 본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상당히 끔찍한 내용인데 히라야마의 조카는 이 책을 읽고 자신이 집에 돌아가면 주인공 소년처럼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은 즉 자신의 어머니, 히라야마의 여동생을 죽일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점을 볼 때, 그의 원 가족은 기사가 딸린 차를 탈만큼 부유했으나, 굉장히 억압된 환경이었고 히라야마 역시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학대를 당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의 그는 자신의 나름대로 평화로워 보이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한 사람이라기보단 과거의 사건에 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인다.

억누르고 있기에 말을 줄여 사람들과의 대화를 피하고 단절된 삶을 살아왔던 그가 영화의 후반부에선 처음 보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나눠 마시며, 어린아이처럼 그림자 잡기 놀이까지 한다. 그리고 다음 씬에선 히라야마의 얼굴을 비추는 굉장히 긴 롱테이크 컷이 등장하는데, 이 컷에선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던 히라야마의 감정을 매우 복합적이고 깊이 있게 보여준다. 히라야마는 분명 웃고 있지만 울고도 있는 묘한 표정을 짓고, 이때 나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BGM으로 깔린다.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for me. And I'm feeling good.

(새로운 새벽이에요. 새로운 날이에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어요. 이 기분이 좋네요) 

히라야마가 반복적인 규칙적 일상들로 견고하게 일구어낸 자신만의 세상에 균열이 생겼고, 그 후 어떤 새로운 삶의 태도를 지니게 되었음을 노래의 가사를 통해 떠올릴 수 있었다. 

큰 상처를 입고 추락한 뒤 어느 정도 편안한 일상을 다시 꾸려내기까진 정말 많은 눈물과 가슴 저림, 비참함, 외로움, 절망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로 상처 난 마음을 계속해서 헤집고, 또 새 살이 돋고, 흉터가 생기고, 그 흉터를 감싸 안고 새로운 날을 맞이했을 때 히라야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행복하기도, 가슴 찢어지게 아프기도 하지 않았을까.


퍼펙트 데이즈란.

살면서 완벽한 하루를 보내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정적 감정과 사건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매일의 일상에 조금씩 침투한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날들이 계속 모이고 모여 내 삶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모든 감정과 경험과 상처들이 나를 성장시켰고 그래서 내 삶이 완벽한 '퍼펙트 데이즈' 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그래서 비록 오늘은 아플지라도 이 상처를 끌어안고 인생을 완주할 수 있었으면. 완벽한 하루가 아닌 '완벽한 날들'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살자고 다짐하며 리뷰를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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