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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팔 Jul 09. 2024

사랑은 우리를 붕괴시켜요.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헤어질 결심만큼이나 잔인한 결심이 있을까. 그럼에도 이 잔인한 결심은 때때로 필요하다. 나의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기 위해. 무너지고 깨진 이 조각들을 쓸어낼 결심. 하지만 결심일 뿐,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이 단계에선 알 수 없다.



박찬욱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의 조각

영화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11번째 장편영화로, <아가씨>(2016) 이후 6년 만에 개봉했다. 그의 영화는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보기가 꺼려지는데, 올드보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대작 중 하나인 <올드보이>(2003)이 개봉했을 당시 나는 초등학교 2학년, 9살에 불과했다.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던 엄마는 올드보이 비디오를 빌려 보고 있었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엄마 품에 안겨 낮잠을 잤다. 그러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는데, 하필이면 최민식 배우가 혀를 자르고 개처럼 짖는 장면을 봐버린 것이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내 혀에서까지 고통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 사건 때문에 영화과에 입학한 이후로도 올드보이를 보지 못했다. 꽤나 강렬한 충격이었다.

다행히(?) <헤어질 결심>에는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은 없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16년 만의 '18세 이상 관람가'가 아니라고. 60년대에 발표한 정훈희의 '안개'라는 곡으로부터 영감을 맡아서인지 박찬욱 감독은 고전적이고 우아한 사랑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물론 이 영화 역시 9살에 봤으면 꽤나 충격받았을 장면들은 있지만... 영화는 15세 관람가이니 나 같은 상황에 처하는 어린 아이가 없기를 바란다. 나이란 것은 영화 관람에 있어 꽤나 중요한 요소이니.


산과 바다:인과 지

영화는 산에서 시작해서 바다에서 끝난다. 산과 바다라는 두 개의 챕터로 나눈 편집본이 존재했던 만큼, 이 장소들은 영화에서 중요한 구분점이 된다. 송서래(탕웨이)가 공자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이라는 말을 인용하는 장면에서 영화 속 산과 바다가 상징하고 있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인자를 너그러운 사람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공자가 이야기한 인자한 사람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안다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된다.

공자의 논어에서 인(仁)은 '나'와 '타인'의 관계성을 강조하며, 이 사이에 요구되는 준엄한 '도덕적 원칙'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헤어질 결심>에서 산은 인자(仁者) 즉, '보편적 도덕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 이성적인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장해준(박해일)의 가족은 모두 산과 같은 이성적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영화 초반부에 아들의 이야기를 하며 정안(이정현)이 '당신과 다르게 나를 닮아서 이과적 성향이 높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해준은 가족 안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상징하는지(智)란 '세상을 이해하는 시작'을 뜻하며 지자(智者)란 주어진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유동적으로 적절한 답을 찾아가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정리하자면 지자요수 인자요산은 지혜란 변화하는 물과 같고, 도덕적 원칙은 굳건한 산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상당히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시간이 생각나는 설명이었지만, 이 의미를 영화에 대입시켜 본다면 꽤 재미있는 해석을 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인물 포스터는 송서래는 바다를 배경으로, 장해준은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이 각각 바다(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사람)와 산(도덕적 원칙으로 굳건히 쌓아 올린 사람)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서래가 자신의 상황과 감정, 필요에 따라 살인이라는 범법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해준은 형사로써 자신의 원리 원칙을 고수하며 자아를 단단하게 쌓아 올린 사람이다. 그런 해준은 서래를 만나 처음으로 사적 감정으로 인해 수사를 망치게 되고, 자신이 '붕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단단하게 쌓아 올린 사람이기에 붕괴된 것이다.

또, 이야기의 마지막에 서래는 바다의 모래사장을 파고 그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녀가 쌓아 올린 모래가 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래 산은 바다의 파도를 맞으며 '붕괴'되고 서래를 영원히 감춘다.


나는 당신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요

사랑이란 감정은 여러 가지 행동을 이끌어낸다. 사랑해서 잘해주기도, 사랑해서 화를 내기도, 사랑해서 떠나가기도 한다. 다양한 모습으로 사랑을 한다. 서래와 해준의 사랑은 이포의 짙은 안개처럼 뿌옇고 불확실한 사랑이다.

왜 이포로 이사를 왔냐는 정안의 물음에 서래는 '안개가 좋아서'라고 답한다. 무채색에 가깝고, 흐릿하고 뭉개진 사랑. 서래는 안개 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기에 이포의 안개가 좋다고 답했다. 이포의 안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데...라는 정안의 대사는 그들의 사랑이 보편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해준과 서래는 분명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사랑을 느끼지만, 그들은 현실적으로 이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사랑하지만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헤어질 결심도 해봤지만 그 결심이 현실이 되지 못한 이 상황에서. 서래는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기로 결심한다. 미결사건의 사진들을 벽에 붙여 계속 보고 또 보는 해준의 방식으로 그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사라지는 방법으로. 아무리 헤치고 들어가도 뿌연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찾을 수 없는 그런 사건이 되어 역설적으로 영원히 해준의 곁에 남는 사람이 된다.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TV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연극, 노래, 만화...

영화 <헤어질 결심>은 이야기를 최대로 표현해 내는 모든 영화적 표현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보다 이 이야기를 더 잘 표현할 방법은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떠나서 영화적으로도 참 아름다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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