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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팔 Jul 20. 2024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리뷰

사랑은 호르몬의 분비로 일어나는 화학 작용이다. 이 호르몬은 일정 기간 동안만 생성되며, 그 기간은 대략 18개월. 길어야 3년이라고 한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춘기 시절, 아니 그 이후에도 꽤나 오래도록 난 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찾아 헤맸다. 운명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여러 연애를 경험한 후 난 내가 어쩔 수 없는 호르몬의 노예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언제나 특별하고 애틋했고, 그 끝은 언제나 지루하고 평범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맨스 영화는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내가 느끼고 경험한 사랑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담아내고 있어 주기적으로 찾게 된다.

조제라는 인물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영화를 공부하기 전부터 결핍으로 인해 이리저리 꼬이고 꺾여 괴상한 모습으로 자란 인물에 끌린다. 왠지 내 모습이 보여서일까. 조제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하반신 마비로 걷지 못하는 조제는 '불구는 보통 사람들처럼 살려고 해선 안된다'는 그녀의 할머니 뜻에 따라 존재를 드러내지도, 밝은 시간에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한다. 할머니가 조제를 학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할머니의 생각에서 장애가 있는 조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맺어봤자 영원할 수 없고 결국 그녀에게 남는 것은 상처뿐일 것이라 보호하려는 것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계속해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애초에 단절되어 사랑도, 이별도, 아픔도, 외로움도 모른 채 살아갈 것인지.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그 끝엔 상처와 아픔만이 남는다 할지라도 우선 시작해 볼 것인지. 조제의 할머니가 선택한 것은 전자였고, 조제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사랑의 시작

언제나 그렇듯, 사랑은 작은 궁금증에서 출발해 관심이란 과정을 거쳐 주관적 판단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츠네오 역시 처음 조제를 만났을 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사실 조제는 이성적 호기심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인물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할머니 유모차 안에 들어있던 존재이기도 하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집에서 고립되어 지낸 탓에 꽤나 독특한 사고와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이 모습이 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테츠오에겐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테츠오는 조제와의 첫 만남 이후 계속해서 그녀의 집을 찾게 되고, 그와의 관계가 조제에게 상처가 될 것을 경계한 그녀의 할머니에 의해 내쫓긴다. 그렇지만 테츠오의 머릿속에선 조제가 쉽게 떠나가지 않고... 뭐 그런. 테츠오의 사랑의 시작은 꽤나 평범하다.

그렇다면 조제는 언제 테츠오에게 사랑을 느낀 것일까? 참으로 불공평하게도 테츠오는 조재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이성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외부인이었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조제의 사랑이 시작되기엔 충분하다. 만약 그녀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 봤었다면 과연 테츠오를 사랑했을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이다. 조제에게 비교 대상이 없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기도 하지만, 테츠오를 사랑하기로 했다는 것은 조재에게 그저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할머니의 뜻대로 남들 눈에 띄지 않은 채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이 아닌, 세상 밖으로 헤엄쳐 나가기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고 해서 갈 사람이면, 그냥 가버려

집을 떠나는 테츠오와 그의 뒤에 앉아있는 조제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비슷한 구도로 등장한다. 둘의 사랑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 사랑이 시작될 때 조제는 테츠오에게 화를 내며 '가버려'라고 말한다. 조제가 테츠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엔 자신이 아무리 내쳐도 테츠오가 자신의 곁에 머물러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서 너를 떨쳐내려 할지라도 날 달래고 내 옆에 머무름으로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보다 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단 걸 알려줘. 이렇게 밀어내도 상처받은 나를 안아줘. 하지만 테츠오는 조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뭐 어쩔 수 없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집을 떠나려고 한다. 여기서 사랑이 시작될 때 두 사람의 감정 깊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테츠오가 계속해서 조제를 찾아가고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조제를 떠나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고 며칠 더 생각나고 마는 그 정도의 마음이었을 수 있다. 테츠오에겐 조제 외에도 많은 일과 인간관계가 존재하고, 심지어 그는 여자친구까지 있다. 하지만 조제는 할머니마저 떠나가고 자신의 곁에 남은 것은 할머니가 주워온 낡은 책들과 테츠오뿐이었다. 자신을 보통의 세상으로 꺼내줄 존재. 그가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처음 느낀 질투에 상처받은 마음을 화로 표현하며 자존심을 챙기려 해 봐도, 테츠오가 뒤돌아서려 하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빨리 내려놓아야 했다. 조제에겐 테츠오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처음이라 더 간절한 이 관계에서 조제의 감정 표현은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끝난 후, 테츠오가 집을 나가려 신발을 신을 때 조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장난치듯 그에게 이별 선물이라며 성인 잡지를 건넨다. 가지 말라고 울면서 잡았던 처음과 달리, 조제는 이 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끝나버렸단 것을 알고 테츠오를 떠나보낸다. 테츠오와의 연애가 첫 연애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이별을 성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조제가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히 어른스럽고 속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첫 연애가 끝났을 때를 돌아보면, 상대의 마음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돌이킬 순 없을까? 정말 구질구질하게 울며 이별이란 현실과 변해버린 그의 감정을 부정했었다. 처음 오븐에서 나올 때는 따뜻하고 쫀득했던 빵이 시간이 지날수록 식어가고 딱딱하게 굳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럴 수 있음을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과 정 반대의 말을 던지며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했던 조제는, 1년 몇 개월의 연애가 끝나고 완전히 다른 태도로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녀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역시 책을 많이 읽어서일까. 또 조제가 테츠오와 연애를 하는 기간 동안 그와의 만남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음을 다 한 사람에겐 후회가 남지 않으니.


테츠오의 눈물

우리 삶에서 만나보기 쉽지 않은 독특한 캐릭터 조제와는 달리 테츠오는 상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조제의 독특한 성격과 행동이 처음에는 관심이 가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독특함에 피곤을 느낀다. 좋아했던 모든 이유가 좋아하지 않을 모든 이유가 되는. 사랑은 호르몬 분비에 의한 화학작용이고 유효기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평범하고 현실적인 사람. 사실 많은 사람들이 테츠오와 같이 사랑하고 이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나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식어버리는 그런 연애.

조제와 1년 정도 만난 테츠오는 소위 말하는 '동태 눈깔'이 되어버리고, 한 때는 사랑스럽다 여겼던 조제의 행동에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식었다 한들 테츠오 역시 조제와의 이별이 슬프지 않았을 리는 없다. 노력해도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변해버린 감정에, 어쩔 수 없이 다르게 느껴지는 조제의 모습에 그도 분명 가슴이 아려왔으리라. 전 여자친구인 카나에에게 바로 환승해 버리면서도 그가 길거리에서 꺼이꺼이 울어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나도 노력해 봤어 우리의 이 사랑을

안 되는 꿈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처럼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서로가 다른 건 특별하다고

같은 건 운명이라 했던 것들이 지겨워져

-박원 <노력> 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테츠오를 보며 박원의 '노력'이란 노래가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이 사랑을 붙잡고 있을 순 없었겠지.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럴 뿐.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외로움이란 감정은 함께한 추억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정 반대의 감정이지만 함께한 추억이 없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외로움이란 것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테츠오를 만나기 전 조제는 외롭다는 감정을 알았을까? 사랑에 상처받은 가슴이 찌르르르 떠는 느낌을 알았을까? 실제로 살이 벌어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심장 언저리가 칼로 후비는 듯 찢어지게 아픈 그 통증을 알았을까? 조제는 이 모든 아프고 무서운 감정들을 테츠오를 만나고 나서야 경험한다. 어쩌면 조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보고 싶었다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는 이런 감정들을 나타내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굳이 두려움을 느끼며 보지 않아도 되는 호랑이를 바라본 조제. 느끼지 않아도 될 고통을 테츠오 때문에 알게 되어버린 그녀이지만 사랑의 고통이란 것은 그 무엇보다 인간을 성장시킨다. 조제는 테츠오를 만나기 전에도, 테츠오와 이별한 후에도 혼자이지만 고독함과 외로움이란 감정을 안다는 점에서 그를 만나기 전과 다르다. 인간으로 살면서 꼭 해야 할 경험. 그녀의 할머니가 '불구니까 보통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면 안 돼.'라고 말하며 피하게 했던 그 '보통 사람'의 아픔을 느낀 후 조제는 비로소 혼자 힘으로 세상에 나간다.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조제는 왜 자신을 '조제'라고 칭할 만큼 이 책을 좋아했을까. 읽고 또 읽은 책을 통해 영원한 사랑과 설렘이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테츠오를 만나는 것을 선택했을까. 언제나 똑같은 설렘으로 사랑에 빠지고, 언제나 똑같은 권태로움으로 이별을 선택하면서도 왜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할까. 흐르는 시간 속에 힘들게 잊어낸 고독을 또다시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조제는 왜. 사랑은 왜 이렇게 항상 아프게만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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