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내 가슴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장면 하나가 있다.
뜨거운 태양볕이 작렬하던 어느 여름의 오후. 밤보다는 한산한 대낮의 강남역이었다.
강의 관련 미팅이 있어 찾은 곳은 고개를 한껏 젖혀야 그 끝을 볼 수 있는 강남역 다운 고층 빌딩이었고 그런 빌딩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들고 나는 출입문은 묵직했다.
내 앞으로 여러 사람들이 줄지어 건물 안으로 속속 들어가고 있었고 내 앞에는 노신사라는 단어가 걸맞게 단정한 백발이 멋스러운 어르신께서 이동 중이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 신사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꽤나 묵직한 그 출입문을 잡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신사는 언제나 그래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찰나라고 하기에는 다소 먼 거리였고 문을 잡고 나를 기다리는 신사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느긋한 그의 여유 덕분에 나는 그 육중한 문을 힘 한 톨들이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뜻밖의 배려에 나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감사합니다"란 말을 건넸고 노신사는 따뜻한 미소로 답하며 멀어져 갔다.
그 날 나의 강남역이 훈훈했던 건 30도가 훌쩍 넘는 기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의 종류와 상관없이 강의의 마무리에는 언제나 "매너의 시작"을 언급하는 습관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매너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매너는 바로 공공장소 출입문을 드나들 때의 배려다. 나의 뒤에 사람이 오고 있지는 않은지 문을 잡고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는 매너. 만약 아무도 없다면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가면 될 것이고 누군가가 오고 있다면 잠시 여유를 가지고 문을 잡아서 닫히는 문에 부딪히지 않도록 기다려주는 매너가 바로 내가 말하는 매너의 사소한 시작이다.
또 한 가지. 나의 앞에 걷던 누군가가 이 사소하지만 따뜻한 배려를 나에게 베풀었다면 잊지 말고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한다. 누군가가 무심히 놓아버린 육중한 문에 몸을 휘청거려본 경험이 있다면 문을 잡아주는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를 수 없다. 그리고 그 표현은 표정이나 제스처가 아닌 따뜻한 육성이어야만 감사의 마음이 선명하게 전달된다.
언젠가 기업 비즈니스 매너를 강의하는 자리였고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 매너의 시작에 대한 강조를 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그 순간 강의를 듣던 유럽 국가 출신의 직원이 박수와 고갯짓으로 격한 공감을 표현했다. 덕분에 나의 그 강조가 조금 더 강조가 되었던 순간이었고 우리에게 부족한 매너와 배려 한 가지를 모두가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매너는 결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매너만큼 사소하고 소소한 것이 없지만 그 작은 배려가 누군가를 얼마나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를 더 많이 알게 되면 좋겠다.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회는 결국 어느 한 사람의 능력과 자질이 아닌 구성원 모두의 관심과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