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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Oct 03. 2023

홈쇼핑 회사를 고소하고 싶습니다


"PD님.. 저 00홈쇼핑을 고소하려고 합니다"


제가 막 홈쇼핑 회사를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홈쇼핑 회사에 몸 담았던 시절부터 귀한 인연을 이어온 한 브랜드사 대표님이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화를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만나서 자초지종을 듣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급히 약속을 잡았습니다.


종종 같이 가서 사장님과 안면도 있는, 꽤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 카페에서 눈에 띄게 초췌해진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이른 저녁이라 간단히 안부만 묻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니 대표님은 한숨을 푹 쉬고 한동안 창 밖만 바라보다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PD님도 잘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에는 홈쇼핑 주력 상품이 하나 있습니다. 꽤나 매출도 잘 나왔고 여러 홈쇼핑에서 러브콜도 받았었죠"


공교롭게도 대표님 입에서 나온 상품이 제가 홈쇼핑 회사 재직 시절 전담하던 상품이라 더욱 귀를 기울여 대표님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올해 초에 00홈쇼핑에서 대대적으로 판매를 해보자고 컨셉도 같이 다시 잡고 생산 물량도 예전에 비해 크게 잡았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좋은 품질로 만들었다고 자부해요. 그런데 세 번 정도 방송 매출이 기대에 못 미치니까 이런저런 핑계로 다시 방송을 안 잡아 주고 있어요. 벌써 몇 달째입니다. 저는 홈쇼핑 회사를 믿고 대량으로 생산해 놓아서 공장에 줘야 할 돈도 있고 쌓아놓은 재고 때문에 창고 임대비도 매달 감당하기 힘들 만큼 나가고 있어요. 일련의 상황에 대해 계약서로 남겨놓거나 한건 아니지만 00홈쇼핑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정신도 맑지 않고 불안 증세도 있고 가끔 환청도 들립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만든 자리였지만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능력도 없는 수준의 일이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던 대표님이 급격하게 횡설수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대표님은 별안간 본인이 처음 사업을 시작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야기는 7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든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10 평 남짓한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의 설렘, 첫날의 점심 메뉴, 첫날 돌렸던 영업 전화 3통 등 대표님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습니다. 제가 놀랄 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을 하고 계셨지만 그만큼 이야기는 길어졌습니다.


5시에 시작된 만남은 11시가 되도록 이어졌고 대표님의 최근 상황과 멘탈을 고려하면 이야기를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5시간을 넘게 들었지만 대표님의 이야기 속 시간은 고작 회사를 만든지 일주일 밖에 흐르지 않았습니다. 카페 사장님은 저에게 눈짓과 손짓으로 나갈 때 조명과 문단속만 신경 써달라며 가게를 떠났습니다.


커피와 빵에는 손도 대지 않고 대표님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처음으로 손해를 보지 않은 8월에 다 같이 바캉스를 떠난 이야기, 공장장 말만 믿고 입금했다가 사기당한 이야기, 누가 들어도 알법한  대기업의 하청 업체로 선정되어 회사를 크게 키웠던 이야기 등을 듣다 보니 시계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커피 한 모금이라도 하셔라 말씀드렸지만 대표님은 묵묵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대표님은 지금 처한 문제에 대한 해결보다 누군가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다시 거리가 환해지고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많아질 때쯤 대표님의 이야기는 홈쇼핑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제가 아는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돌고 돌아 홈쇼핑 회사와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 시간은 오전 10시였습니다.


꼬박 17시간이 넘게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대표님의 표정이 조금은 후련해 보였습니다. 저 역시 놀랍게도 전혀 피로하거나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떠한 조언이나 도움을 드리지 못했는데 대표님은 머리가 맑아졌다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비로소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꾸벅꾸벅 조는 와중에도 대표님과 홈쇼핑 회사가 정말 법적으로 싸우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몇 주 뒤 대표님으로부터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00홈쇼핑 채널을 모니터링해보니 해당 상품의 방송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당히 파격적인 가격과 혜택으로 말입니다. 서로 약간의 양보를 통해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은 것입니다. 


최근 대표님은 더 이상 00홈쇼핑과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몇 번의 방송을 통해 일부 재고를 소진하긴 했으나 마진 측면에서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했다며 다른 채널을 통해 판매를 알아보고 있다며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꼭 한번 보자는 대표님이 또 얼마나 긴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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