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동반자
춘천의 유년시절,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쯤 주말의 놀이터는 주로 교회였다. 이상하리만큼 그 유년시절에 겪은 몇 가지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하는데, 이름에 '걸'짜가 들어가는 교회 선생님이 유독 잊혀지지 않는다. 이 교회의 선생님뿐 아니라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른들이 몇 어른 계신데 이제야 그 어른들의 공통점을 정리해보니 모두 아이들과 지겹도록 놀아줬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무엇을 보았는지 마치 친구처럼 오랜 시간 곁에 있어줬던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왜 아이들과 놀아줬을까.
기타노 다케시는 한 아이가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작정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 마사오 라는 아이가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슬로우가 걸리면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나오는데 마치 그 초반부 한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 이 마사오가 기쿠지로란 녀석이군, 하며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 마사오와 놀아준 어른 '기쿠지로'의 영화였음을 종반에 가서 깨닫게 된다. 기쿠지로는 마사오가 이제는 잘 만나지 못하게 된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미명 아래, 도박, 음주, 폭력을 자행하며 철 없는 어른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한 행동을 하며 마사오와 동행한다.
그렇지만 이 철없는 어른의 철 없는 행동의 동일선상에는 마사오와 놀아주는 행위가 포함된다. 이런 저러한 이제 어른이 해선 안될법한 행동을 하면서도 아이와 늘 놀아주고 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중 만나는 어른들 모두 각자 세상이 정한 어른의 모습은 전혀 갖추지 못했다. 글쓰겠다고 남의 옥수수를 서리하며 다니는 작가, 두 남자 폭주족, 등 그런데 이 사람들은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해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이 영화를 만들며 어느 경우에는 각본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냥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을 찾아내고 그걸 영화로 찍었다고 하기도 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상실해간다. 주변의 죽음, 나의 아픔, 돈, 시간, 모든 것이 상실해가는 것을 보고 있다. 상실과 상관없이 느껴지는 아이들은 그저 자라는 저 망각 속의 먼 존재이다. 근데 어느 순간, 아이들도 동일한 상실을 겪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세상의 모순, 죽음, 시간을 동일하게 상실해가며 단지 어른들의 글과 문법을 몰라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를 만나는 순간이 온다. 그 때, 나는 그 아이와 내가 같은 팔자 임을 느끼게 된다. 마사오의 어머니에 관한 아픈 일화를 그림일기를 통해 보던 기쿠지로는 너도 나와 같은 팔자구나 라고 지나가듯이 대사를 한다
같은 팔자임을 아는 어른, 그 어른들은 지금도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아이들과 함께 여전히 상실하며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을 통해 다행히 지금까지도 성장을 해 나간다. 이 성장의 비밀을 가리려는 세상은 아이들과 노는 것이 어색하고 의미 없게 느껴지게 만든다. 성경에서도 아이들이 예수에게 다가오자 사람들이 내쫓듯이,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마치 아이들과 놀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근데 가끔, 어린 왕자를 발견한 어른들은 뒤늦게서야 그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들만이 이 여름을 보낼 자격을 얻게 된다. '마사오'를 위해 보낸 시간이 결국 '기쿠지로'의 시간이 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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