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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fter lunch Apr 11. 2020

싸움의 원칙과 기술

사춘기 중년의 2막 1장, 아내를 이해하기까지


(케이스 1)

이번에는 잘 올라가야지 다짐하며 151번 버스를 기다린다. 서귀포의 영어교육도시에서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빨간 버스는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헐레벌떡 올라탄다. 그때부터 땀이 난다. 육지는 제주보다 5도 이상 낮은 기온이 될 거라며 한 겹 정도 더 껴 입었는데, 이게 맨날 에러다. 열이 많은 인간인 데다 샤워 후에 걷고 뛰면 항상 뒤늦게 옷 속이 젖는다. 서울 가려면 3~4시간 뒤쯤에나 도착하는데, 거 짐 쫌 줄이려다 가는 내내 힘들어한다. 

공항 가는 길에서, 비행기 안에서 늘 더워서 땀을 흘렸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가방에 덧입을 옷을 넣었다가 추워지면 입으면 될 것을 왜 그리 가방 매는 걸 싫어하냐며 혀를 찬다. 난 사춘기 중년이다. 왠지 모를 반항심에 좀 더워도 가볍게 움직이는 게 좋다는 납득하기 힘든 변명을 해댄다.

가볍게 다니고 싶은 나의 계획이 아내의 의견보다 못하다는 인정을 하기 싫은 탓이란 생각이 든다. 다음엔 아내 말을 들어봐야겠다. 여러 번 실패해야 이해한다. 사춘기 학생처럼...


(케이스 2)

중학생 딸이 공부를 안 한다고 해서, 방학 전에 계획표를 세웠다. 같이 앉아 실천 가능한 정도의 공부량을 정했고, 책상에 붙여 늘 확인하자 다짐했다. 앞서 말했지만, 딸은 중학생이다. 방학은 재밌게 놀아야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고, 공부는 해야 되는 막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억지로라도 할 텐데, 그 계획표는 아무런 보상은 없었다. 우려는 했지만...

며칠 뒤, 아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공부를 안 해, 영어단어 암기하는 거 억지로 좀 하고, 문장과 함께 외우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고집만 부려] [여보가 세운 계획표 끔찍해. 실현 가능성도 효율성도 떨어지는 것 같아] [아빠 권위 떨어뜨리기 싫으니까 여보가 와서 수정해]... 속상했다. 애가 실천을 안 하는 게 나의 잘못된 계획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따져 물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30년 정도를 누군가의 딸로서 살아온 여자가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다. 더군다나 사회생활을 거의 안 해본 40대 여자가 똥꼬 발랄한 중학생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안다. 그 속상한 나날들 속에 남편이란 자가 세운 계획이 그저 잘 실천되길 바랬는데, 막상 점검해보니 애는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던 거다.  온전히 자신만 자녀를 케어하는 느낌에 속상하던 차에, 2주에 한번 올라오는 남편이 왠지 밉게 보였는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표현했다... 고 아내가 설명한다.

설명을 들어도 내 계획이 왜 끔찍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들리지 않는다. 아주 짧고 축약된 문장이라 실수했다고 사과하는데, 납득이 안됐다. 단어 하나를 꼬투리 잡고, 그 단어를 왜 사용했는지만 이틀째 캐물었고, 원하지 않는 대답들은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참 문자로 자신의 의견을 적어나가다 화면 상단에 "내 사랑"이라는 글이 있는 걸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이 같지 않았다. 실수했다고 사과했는데도 받아주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작년에 저 두 가지 상황으로만 아내와 싸웠다.  우린 다행히 한 번 싸웠던 일로 다시 싸우지 않는 편이다. (예외적으로 아내는 십수 년 전 일도 가끔 꺼내어 자신의 무기로 삼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이미 내가 이긴 판이라 생각한다) 


결혼 초기부터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거야. 대신, 싸우더라도 잘 싸웠으면 좋겠어. 30년 가까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자랐고, 동네가 달랐고, 날씨가 달랐으며, 다른 음식들을 먹어왔으니, 100퍼센트 싸울 텐데 원칙을 지키고 싸울 때마다 결론을 지었으면 좋겠어. 같은 일로 2번 이상 싸우지 않는다면 40 아니면 50살이 되었을 때는 거의 싸울 일이 없을 거야". 아내도 동의했다.


우린 싸워왔고, 거의 대부분 싸움의 원칙을 지켰으며, 또 대부분은 암묵적으로 결판이 났다. 예상대로 싸움의 수는 줄어왔고, 싸움의 질도 아주 좋다. 화해하기까지 별다른 의식도 없고 2~3일 정도 복기해보면 누가 무엇을 더 잘했고 못했음을 알게 되었고, 비슷한 상황에선 서로의 깨달은 바대로 참아낸다. 그렇게 싸워갈 것이다. 


싸움의 원칙


1. 당사자 외의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 


: 어릴 때, 부모님이 싸우는 걸 봤다. 대부분은 잔잔하게 끝나지만, 할머니 얘기가 나오는 순간 판이 커진다. 가족을 언급해서 싸우는 순간, 이미 가족 간의 싸움이 된다. 그때부턴 제대로 된 팩트체크 없이 억측, 비난, 탄식이 난무하는 걸 느꼈다. 가족을 건드리는 것은 싸움의 본질을 망각하게 한다.


2. 폭력은 절대 금지

: 폭력 하는 순간, 그대로 이혼하자 했다. 누구든 성질을 못 이겨 뭔가를 집어던지고 싶고, 막 때리고 싶은 게 사람이다. 그래도 한도는 정하고 싶었는데, 물리적/육체적 폭력만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다. 대신, 말로는 엄청 때려댔다. 아내가 그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무지하게 놀랐었다. 나도 장난 아니었지만... 암튼, 이혼을 각오하고 때리던가 아님 참던가였는데, 다행히 원칙이 날 지켜줬다.


3. 결론을 내자

: 무승부가 되면 연장전을 하고 승부차기를 해서라도 결판이 나야 찜찜하지 않다. 장기 토너먼트일 때는 그 간의 승부들의 점수를 합산해 등수를 매기겠지만, 둘이서 하는 싸움에 승부가 안 나면 결국에는 승패가 날 때까지 싸우게 돼있다. 부부간의 싸움에도 결론을 내리는 편이 낫다. 바로바로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서로 알게 되겠지만, 가끔씩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어젠다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각자가 패해야만 한다. 부부싸움에서 서로가 이겼다면 그 싸움은 평생 싸움거리가 된다. 서로가 패배를 인정하면,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했을 때 서로 싸우지 않는다.


4. 항상 다른 이유로 싸우자

: 앞서 말했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싸울거리는 많겠다고 생각되지만 막상 싸워보면 싸우는 이유는 그렇게 많지도 않다. 자녀문제, 시댁/처가댁 문제, 교육, 경제, 습관, 청소, 운동, 의식주, 성향,..(정치나 종교는 웬만하면 같은 게 좋다. 인생을 걸고 싸워야 될 수도 있으니) 뭐 그 정도 안에 다 들어온다. 1달에 한 번씩 싸우면 2~3년 안에 다 싸워볼 수 있다. 정말 잘 싸웠다면, 결혼 후 3~4년 뒤에는 싸울 일이 드물어야 한다. 심지어 우리 좀 싸워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싸움의 기술 


1. 이유를 묻지 마라

: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 아까 왜 그랬어?", "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넌 왜 그래?", 왜 왜 왜...  상대의 말과 행동이 자기 입장에서 납득이 되지 않을 때 우린 싸운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를 물어 재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며 상대가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 말이다.  이유는 물어 뭐하겠는가? 이미 저질러버린 말이나 행동인데, 납득이 되면 충분히 넘어갈 일이었겠지, 물어본다는 건 이미 용서 못하겠다는 거다. 그러니, 이유 따위 묻지 마라.


2. 다름을 인정하라

:  일단, 이유를 묻지 않았다면, 잘했다. 그치만 궁금할 테다. 부부간의 싸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전략이 굳이 필요 없다.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딱 그거다. 이유도 논리도 다른 감정도 없고 그냥 다른 사람인 걸 인정하면 잘 싸울 수 있다. 처음은 어려운데, 한 두 번 그 사실을 인정하면 그 다음부턴 아주 쉽고 재미있다.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절대 없을 것 같은 나와 다른 사람이 바로 내 아내구나, 햐~ 이렇게 다른단 말이지... 하면서 말이다.


3. 져주지 말고 져라

: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런 말을 많이 들어봤겠지만 경쟁사회에서 자라온 다 큰 어른들에게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아는가? 특히, 같이 살고 있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지는 것은 쉽지 않다. 애들이 싸울 때 옆에서 보면, 큰 녀석이 좀 져주면 될 텐데 하고 생각될 때가 많은데, 그런 것 하고는 좀 다르다. 대 놓고 따지기 시작하면 절대로 결판이 안 나는데, 그 이유는 각자 30년 넘게 쌓아온 자기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몇 일안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는 걸 싫어하고, 논리적으로 이길 수도 없는 싸움에서 져주지도 않고 어떻게 지느냐? 져줄 수는 있지만, 금방 티가 난다. 이겼다고 확신하면서도 져주는 걸 모르겠는가? 지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상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나의 주장도 틀리지 않았을 뿐, 대부분은 상대의 주장이나 논리도 완벽히 옳다. 그러니 내 말을 하지 말고 상대의 말을 인정해주면 지는 것이고, 이것이 부부싸움에서의 비밀 기술되겠다.


4. 필요하면 링을 벗어나라

:  아무리 원칙을 지키고 기술을 발휘해보고 난리를 쳐봐도 쉽게 안 풀리는 싸움도 있다. 특히, 싸움의 초기에 그런 일이 많다. 아직 기술도 부족하고, 원칙이고 나발이고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흥분하기 쉬운 초기엔 감정이 앞선다. 경험상, 차라리 물리적으로 좀 떨어져 있으면, 아주 잠깐은 상대가 없어져 황당해하겠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상대 입장이 되어보는 시간이 생길 수 있다. 어설프게 난 잘 싸울 수 있고, 설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말하다가 상대의 반응에 오히려 더욱 큰 실망을 하기 쉽다. 잠깐 쓰레기를 버리로 나가도 되고, 산책을 하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부부싸움에서 링을 벗어나는 건 백기를 던지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없어지는 건 어쩌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싸움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앞으로의 자신을, 예전의 모습보다 괜찮아 지게 만드는 첫 걸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를 들여다 봄에 있어 객관적이다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타인의 시각으로 성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를 모르고, 내가 어떤 지 모르고, 상대의 입장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 모른 채,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고 사랑 싸움을 한다는 게 어쩌면 더 말이 안되는 것이다. 


나를 볼 때 가끔 하늘을 본다. 바쁘게 움직이는 구름이 있고, 끝없는 푸르름이 있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도 있다. 그 속에 난 없지만, 생각을 멈추게 해주는 뭔가가 늘 있다. 내 변명을 멈추고 올려다 보는 하늘은 내게 간절히 얘기하지 않는다. 깊고 넓고 높은 존재 자체가 날 가소롭게 하고,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내가 뭐라고... 그게 뭐라고...' 


싸울 일이 없는 건, 아예 관심이 없는 관계이거나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라는 게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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