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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통인시장을 돌아보다

통인시장을 꽤 오래전에 다녀본 이들이라면
그 구석 어디엔가 조린 떡볶이를 팔던 할매를 기억할 것이다.
이젠 그 맛도 하나의 인기가 되어버린 모양.
떠올리기 싫어도 떠올려지는 그런 곳은 늘 존재한다.


나에게 그 장소가 그러했으되 이유의 심연을 깨닫기는 어려워 보였다.
오래전부터 보내어져 길러졌던 외가에 대한 낯섦 때문이었을까.
시장 뒤켠으로 70년대 한옥이 참으로 옹색하게 붙어있던 곳.
서울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어 오랜 시간이 지나가보아도
볼썽사나운 모습에 80년대 어린 시절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던
슬픈 공간아.


그 골목을 돌아 한 번 꺾고 두 번을 돌아가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나의 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삐거덕 거리는 문소리에
밤늦게 들어가던 이모의 모습을 세든 식구 모두가 알아차리던
곰살맞던 그 풍경에 족보 없는 개들은 왜 그리 짖어댔는지.
그 늦은 시간에도 외할아버지는 말없이 취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꽤나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모양으로
때론 다른 이들의 부탁으로 신나에 싸구려 페인트를 섞어 벽 칠을
해주곤 하였다.
왜인지 모르나 큰 대문을 나설 때면 주인댁에 인사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있었는데,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그 룰에 따라야 했던 것이므로
최대한 문틈으로 나서며 소리 나지 않게 군것질을 하러 갔었다.


어머니는 가끔 전화로 안부를 전했거니와 때론 나를 데리러 오기도 하였는데
돌아가 보았자 공장과 붙어있던 우리 집에서는 저녁까지 동생과 혼자이기
일쑤였기에 꽤나 어린 시절부터 텔레비전은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사실 그것에도 꽤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던지 망할 몽상이 하루의 주 일과였으니
아마 이 긴 우울감과 진지함, 혹은 동물에 대한 연민은 대략 그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이었다.


하루는 다섯 사람의 이모가 모인 곳에서 할아버지의 술주정이 시작되었는데
그날은 왜인지 오기가 생겨서 할아버지의 그 모든 이야기를 옆에서 들어주었었다.
그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펜과 종이를 주어 그의 이름석자와 글을
쓰도록 부탁했고 어디엔가 고이 넣어두었던 기억이다.


그는 하염없이 자신의 불찰로 일찍 세상을 뜬 큰아들을 그리워하다가 하다가
10분마다 똑같은 레퍼토리를 입에 침이 말라 소리가 안 나올 적까지 해대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고도 30년을 더 장수하였으니 말년에 우리는 어느 날인가 손을 부여잡았었다.
그 형용하기 힘든 손의 질감을 여전히 기억한다. 상상 속에서는 찾기 힘든 그 거친 느낌은
무엇으로 표현할까.


80년 세월의 연민과 스스로에 대한 자학, 몰락한 집안의 어른이 가지는
그 모든 생체기가 채 아물지 못하고 켜켜이 쌓여 상처투성이인 손등과 일반인의 세배는 됨직한
두께의 손톱은 하나의 거대한 칡덩이를 연상케 했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에만 칡을 보아 왔기에
이 비유는 온당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와 유사한 사물로 비유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우리는 꽤나 비슷한 유전자를 공유했던 모양으로
그 감수성과 연민, 동물에 대한 애정과 여린 마음씨를 열성유전으로 부여받은 바였다.
쓸쓸하게도 탈모는 우성이었으되 전해졌던 것은 중요치 않으리.


1년여 마다 찾아갈 때마다 그의 직업은 놀랍게도 바뀌어 있었다. 때로는 공사장에서, 때로는 경비로
오랜 시간 동안 보내왔던 그의 모습을 나는 왜 항상 기억 저편에 지우려고만 했던가.
잘난 조상이 아니면 잊힐 것임을 우리는 기약하는 것일까.
그에게 털어서 유산한 푼 나오지 않는다면 이제는 남남이 되는 그러한 관계 말이다.


그는 유난히도 인왕산을 좋아했는데 그에게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아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었다. 어딜 가도 가난의 냄새가 났던 그 동네를 사람들은 효자동이라 불렀는데
어느 날 찾아가 본 그곳에는 한옥이 허물어지고 갤러리와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그 난장 맞은 어색함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오며 볼일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길이었다.


그 썩은 내와 비린내가 늘 풍겨왔던, 때로는 하늘빛이 보이지 않는 길가에 약간의 물이 고이던
시장에서는 이제 천막은 사라지고 근대의 모던한 모습이 곳곳에 들이쳤는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은 그 한산한 모습뿐이었다.
할매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나의 기억을 복기시켜 준 것은 간장떡볶이 1인분을 주문했을 때 그녀가 시작했던
그 모든 과정과 손동작으로 오랜 시절 그때를 기억나게 해 주었다.


엉덩이 뒤 편에서 식용유를 한 국자 푸더니 두르고 말라빠진 지난날의 떡조가리를 다시금
덩어리채 던져서 무심한 표정으로 휘휘 젓던 그 모습을 내 기억보다 눈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유치원시절 아니 국민학교 그 언제까지인가 외할매는 장을 보고 올 때면 가끔 이 공간에서 나에게
떡볶이를 사주었었다. 그 맛에 대한 감정 역시 내리 유전인 모양으로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또다시 전해준 그 장소.
어머니 역시 떠나기 전에 이 맛을 그리워하셨을까.


나는 소비자의 괜한 심술처럼 이번에는 매운 떡볶이를 1인분 더 포장해 달라 하였다.
그녀는 기쁜 내색 같은 것도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처음의 행위를 반복해 나갔다.
무엇인가. 그녀에게 아니 이 노인에게 이 삶이란 것은 그리고 이 반복되는 일들의 의미는.
잊혀 가는 것을 살리기 위한 장인정신도 아니요. 세상의 끝에서 마지막 장면을 복각하려는
처절함도 아닌 그 무엇인가.
나는 다만 옛 기억을 위해 한 번 더 그에게 품새를 부탁할 따름이었다.


하교시간이었다. 여고생무리가 지나간다. 당연히 이런 구닥다리 분식에는 관심조차 없는 모습으로
화력이 어지간히 약한지 떡은 도시 익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아마 5월이었을 것이다. 하늘이 파랬던 기억이고 참으로 쾌한 공기였으되 그 신선함은 경복궁 담자락을
넘실거리며 이곳까지 넘어오지는 못했다. 열 발자국만 가면 시장의 입구에서 칼라로 세상이 펼쳐지는데
그녀와 나는 흑백의 장막에서 예술사진을 찍고 있었다.


예상대로 검은색 봉지에 떡 두 덩이가 담겼다. 이것도 떡볶이라면 그러할 듯.
우리는 마치 행위예술을 하듯 관념의 떡볶이를 건네받고 기억의 잔금을 치렀다.
이제는 그 출연진 가운데 누구누구가 존재하는지도 불명확한 연극 속에서
서로가 독백을 외치면서 외롭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 앞을 가득 메운 고등학생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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