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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득득이를 그리며 쓰다

딱 1년 전의 일이었다.


아내의 배에는

참으로 어렵사리

아이가 자리 잡았었다.


한국어에는 없는

과거완료형을

구태여 쓰려하는 것은


내 마음이

그 일 자체를

과거 완료로

만들고 싶은

마음의

결정일 것


10년


딱 10년이 걸려

얻은 아이를

우리는 '얻을 득'자로

득득이라 불렀었다

 

그 혹은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커가는 듯했다


3달이 된다면

사람들에게

짜잔

서프라이즈를 할

계획을 세웠던 그때


60일을 넘어가는

그날


그날은

마침

늦은 추석과

공교로이 겹쳐 있었다


"오빠

나 지금 병원에 가

피가 안 멈춰"


퇴근하고 나서며

버스표를 취소하고

디스크로 초췌해진

허리를 붙잡고

그렇게 달렸었다.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

고백하건대


그날 나는

10년 된 중고차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180킬로로 달려갔다


아마 그게

파리-다카르 랠리였다면

좋았으련만


아내는 임산부실에

누워있었고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보호자가 온

낌새를 눈치챈

오래된 짬밥의

간호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를 담당의에게

안내했다


그녀의 처신은

분명 옳았을 것이다


담당의는

아이가 숨을 안 쉰 지

며칠은 된 듯하다 했고

아내는 울면서

한 번만 더 촬영을

그 망할 놈의 촬영을

해 보자고 말했다


의사는

산부인과 교과서와

수 차례 임상시험의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한 차례 다시

살펴보자 했다


이제 갓 대학교수가

된 듯한 얼굴이 반듯한

전공의는 아직 채

여드름 자국이 지워져 있지

않았고


그를 시중드는 간호사는

고모뻘로 보였으나

단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남편이 이런 촬영을

보는 것은 극히 예외라며

선심을 쓰듯

그는 죽은 아이를

다시 한번 보여 주었고

의학적 지식이 없는 우리는

기적, 뭐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나름 논리적으로

이야기해 보았으나


의사는 엷은 미소를 보이며

우리를 바라보지 못했다


간호사는 한 걸음을 더

뒤로 물러났고

빠른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산모의 무엇인가 위험에

빠진다는 라틴어 같은

이야기에


아무 말도 없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고


아내는

내가 보았던

삶 가운데

세 번째로 눈물을 흘렸다


임산부실로 돌아와

8명이 꽉 찬 병실에

우리는 구석자리를

배정받았다


8명 가운데

6명은 핑크색 가운을


아내를 포함하여

내 옆의 산모는

푸른색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그 색의 의미를

알고 손이 떨려왔다

 

출산 준비 산모와

수술 대기 중인 산모


나는 마치


초현실 속의

빨강과 파랑의

삶 속에서


저 옆에 닭다리를

뜯으며 재잘거리는

핑크색 산모의

머리채를

잡고 싶은

내면의 악마가

솟아오름을

간신히 견뎌냈다


아내의 침대 옆에는

보조 의자가 있어

이 자리에서 3일을

보냈는데


사람이 집을 나와

여독이 생김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각 침대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우리 옆 옆의 파란색 가운의

산모는

3일 내내 쉼 없이 울고 있었다


아내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틀 후

내 손을 잡고

차가운 수술실로 들어갔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이 나 그 비스름한

존재에게

남을 위해 기도를 하였다


현대 의학의 발달이

서러운 하루였었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아내는 나왔고

득득이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후로

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뭔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으나

아내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우리가 60을 넘게 살지

아무도 모르지만

통계 수치를 본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득득이는 우리보다

365배를 더 빠르게

세상을 느끼다 떠나갔고


그가 느꼈을 세상을

나는 그리워한다


그 세상을 우리는

옳게 살고 있는가


하루가 지날수록

핑크색 산모들은

퇴원을 했고


병실에는 푸른색의

환자 두 명이 남겨졌다


옆 여성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나

며칠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 모습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서글퍼졌다


득득이는 그렇게 떠나갔고

1년 지난 오늘

아내가 득득이의

1년을 꺼내 들었을 때


또 다른 아가는 이제 막

60일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당연한 듯 태어나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 하더니


태어나는 자체가

이렇게 힘든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득득이는

비록

우리보다 먼저

어디론가 갔지만


내가 그보다

나은 것은 없으리라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준

아이에게

감사를 드리며


1년 사이에

기도가 늘어간다


종교인도 아닌 것이

늙었다는 증거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나보다 남을 위해

기복을 비는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20대의 나였다면

조소를 금하지 않았을 것이네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네


다만 감사할 뿐

 

득득아

잘 자라

이제 밤이구나

이불도 잘 덮고

가을이라

날이 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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